"보토현(補土峴)과 성북동천(城北洞天) 그리고 성북동"이야기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그 산줄기를 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분수령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한북정맥(漢北正脈)으로 이어지고 삼각산 영봉(靈峰)에서 남쪽으로 그 방향을 돌려 삼각산 즉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일구고 보현봉(普賢峰)에 이르러 동남향하면서 형제봉(兄弟峰)과 구준봉(狗蹲峰)을 지나 마침내 한양(漢陽)의 주산(主山) 북악(北岳)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산줄기의 흐름을 풍수지리적으로는 내룡(來龍)이라고 하는데 산의 기운(氣運)이 산줄기(龍)의 뻗침과 함께 전해져 온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헌걸찬 정기(精氣)가 산줄기의 뻗음을 타고 한양의 주산인 북악에 와서 맺혀 그 기운을 한양 도읍에 불어 넣어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봉에서 북악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양의 입수(入首)목에 해당되는 보토현(補土峴)에서 잘록해져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있어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였기에 나라에서는 세검정에 있었던 총융청(摠戎廳)에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특별한 날을 잡아 백성들을 동원하여 잘록한 곳에 흙을 퍼다 날라 메꾸어서 산의 기운이 원활하게 이어져 전해지도록 하였는데 흙을 보충한 고개라는 의미로 이곳을 보토현(補土峴)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더욱 북돋워 주어야 할 보토현 아래에는 북악터널이라는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으니 좋은 기운이 서울 장안까지 펼쳐지기는 이젠 글렀는가 봅니다.
2012. 9. 26 "프레시안"에서 발췌
북악의 동쪽으로 뻗어 있는 능선에 있는 숙정문 바깥 골짜기로부터 그 흐름이 시작되는 성북동천(城北洞天)은 도성 밖의 경치 좋은 곳으로 '자하문 밖'과 함께 으뜸으로 꼽히는 곳으로 이 일대를 북둔(北屯)이라고도 부릅니다. 도성 수비를 맡은 군대인 3군문(三軍門) 즉, 훈련도감(訓練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중에서 어영청(御營廳)의 북쪽 창고(北倉)가 있었던 곳이라 북둔이라 불렀습니다. 북둔 일대는 복숭아나무가 많아서인지 홍도동, 도화동, 복사동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복숭아나무는 보이지 않고 그 명칭이나마 동명(洞名)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인왕산(仁王山)의 살구꽃, 서대문 밖 서지(西池)의 연꽃, 동대문 밖 동지(東池)의 수양버들, 세검정 근처 탕춘대(蕩春臺)의 수석(水石), 그리고 성북동의 복숭아꽃(北屯桃花) 구경을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아쉽게도 서지의 연꽃과 동지의 버드나무 그리고 탕춘대의 수석은 그 자취를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메꾸어지고 복개되어 원형 복원이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인왕산과 북둔 일대는 지금도 찾는 이들이 많이 있으니 이곳에다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는 것을 서울시에서는 정책적으로 시행하여 옛 정취를 살려보려는 노력을 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삼청각(三淸閣)과 대원각(大苑閣)은 권력자와 기업 총수들이 서로 만나 정경유착(政經癒着)의 야합(野合)을 하던 요정(料亭)이었는데 이 두 곳이 모두 성북동천 상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삼청각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음식점과 예식장으로 바뀌었고 대원각은 주인이 법정(法頂)스님에게 기부하여 지금은 길상사(吉祥寺)라는 멋진 도심 속의 사찰로 바뀌었습니다. 대원각의 소유주였던 김영한(1916-1999)씨는 16살 때 조선권번(朝鮮券番)에서 궁중아악(宮中雅樂)과 춤과 노래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되었고 그 이후 월북시인 백석(白石)(1912-1995)과 사랑에 빠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雅名)까지 받았으며 1953년에는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소유>라는 책을 통하여 법정 스님을 알게 된 후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고 법정 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法名)을 받았는데 이런 연유로 길상사라고 절 이름을 지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가진 것을 모두 보시하고 몸은 화장하여 길상사 뒤편 언덕에 산골(散骨)하였으니 그야말로 정신적인 스승인 법정 스님의 가르침인 '무소유'를 철저히 실천한 것 같습니다.
성북동천 하류에 있는 성락원(城樂園)은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이었으며 의친왕 이강(李堈)이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성락원은 자연적 지형을 잘 이용한 별장으로 생활(生活), 수학(修學), 수양(修養)의 기능을 하는 앞뜰과 후원(後園)의 역할을 하는 뒤뜰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롯한 행서체(行書體)의 좋은 글씨가 바위에 많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심상응의 후손이 구입한 사유지로서 일반인의 관람이 불가능하여 전해지고 있는 낡은 사진으로만 그 일면을 엿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북향(北向)을 한 독립지사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이 조촐하나마 의기(義氣)가 서린 아담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만해는 결국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광복 1년 전에 죽어 지금은 망우리 독립열사 묘역에 부인과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심우장에는 그의 오도송(悟道頌)이 걸려 있는데 거침없는 만해의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장부는 가는 곳마다 고향이거늘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사람들은 시름속의 나그네로 오래도록 보내네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한소리 큰 할로 삼천 대천세계를 깨뜨리니
설리도화편편비(雪裏桃花片片飛) 눈 속 복사 꽃잎이 펄펄 날리네
그리고 성북동천이 한양도성의 바깥쪽을 휘감고 돌아가는 곳에서 선잠단지(先蠶壇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선잠단지는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를 많이 생산하기 위해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를 배향하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왕비(王妃)가 친히 행차하여 양잠(養蠶)의 시범을 보여주던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풍요로운 먹을거리(食)와 입을거리(衣)를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농사(農事)와 양잠(養蠶)을 권장하는 행사를 왕과 왕비가 직접 나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왕은 전농동에 있는 선농단(先農壇)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행사(親耕行事)를, 왕비는 성북동천 아래에 있는 선잠단(先蠶壇)에서 누에치는 시범을 보이는 친잠행사(親蠶行事)를 주관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백성들의 노동력이 늘어날 것이고 늘어난 노동력만큼 생산도 많아져 백성들의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풍요롭게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성북동천 하류에는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이 전 재산을 투척하여 건립한 간송미술관과 월북 작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고택 등도 둘러보면 좋은 곳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종로에서 아흔아홉 칸의 대부호의 집에서 태어나 휘문고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문화재가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미술품과 문화재의 수집과 보존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또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하여 서화(書畵)뿐만 아니라 석탑, 석불, 탱화 등의 문화재를 수집 보존하는데 힘썼습니다.
보화각은 1966년 그의 호를 따서 간송미술관으로 개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이곳은 문화재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만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에 보관된 문화재는 국보 70호인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原本)을 비롯한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그리고 겸재(謙齋) 정선(鄭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작품 등 5천여 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복개되어 자동차 도로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하였던 성북동천에 기대고 있는 마을들은 물줄기를 경계로 해서 남쪽과 북쪽이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양도성 밖 북쪽 성벽에 기대고 북향을 하고 사는 남쪽마을은 서민들의 삶이 물씬 풍기는 1960, 70년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구준봉(狗蹲峰) 아래 양지바른 언덕에 둥지를 틀고 남향을 하고 사는 북쪽마을은 재벌 회장들의 대저택이 들어섰었는데 그 재벌들이 목멱산(木覓山) 남쪽 기슭인 이태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지금은 외국대사(外國大使)들의 저택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가까운 곳에 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한 외교 타운도 세워져 있습니다.
1970년대 당시 소위 '도둑촌'이라 불렸던 이곳에 재벌 회장집들이 들어설 때 현지 주민들의 내몰리는 모습을 비둘기에 빗대어 노래한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는 그때의 광경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최근에는 뉴타운 개발로 쫓겨나는 서민들의 신산스런 삶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중략-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선잠단지 그리고 길상사에 들러 요정을 사찰로 활용한 가람배치에 대하여 알아보고 사찰에 세워진 성모 마리아 닮은 보살상도 감상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외교관 거리로 변한 성북동 골목을 지나 북악 스카이웨이를 넘어 예전엔 배나무 과수원이 늘어서 있었던 국민대학 건너편 배밭골로 내려섭니다.
정릉삼거리에서 아리랑 고개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오른쪽에 정릉(貞陵) 가는 길이 안내판과 함께 나타납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이자 조선왕조의 최초의 왕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으로 본래 경운궁(慶運宮) 서쪽, 지금의 주한미국대사관저 뒤편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그때의 석물(石物) 일부가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태조의 신덕왕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던지 그의 묘를 사대문 안에 두고 그 동쪽에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인 흥천사(興天寺)를 지금의 서울시의회(과거 국회의사당) 쯤에 170여 칸 규모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소생들과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등 개국공신들을 참살(慘殺)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분묘(墳墓)는 지금의 이곳 정릉으로 이장시키고 정자각(丁字閣)은 헐어버려 그 목재와 석재를 가까이에 있는 중국 사신이 머무는 북평관(北平館)의 북루(北樓)를 짓는데 썼고 신장상(神將像)이 새겨진 병풍석(屛風石)은 홍수로 떠내려간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로 다시 놓는데 쓰게 하였습니다. 그 병풍석은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지하에 묻혀 있다가 청계천 복원공사로 훤히 그 모습을 드러내 지금은 청계천 광통교 밑에 가면 언제라도 볼 수 있습니다.
큰 규모로 지어진 흥천사도 정릉의 이전에 따라 아리랑 고개 초입에 작은 규모로 옮겨져 한때는 회갑잔치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신흥사(新興寺)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최근에 본래의 이름인 흥천사를 되찾았습니다. 아리랑고개는 정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넘어야만 하는 고개이기에 본래 정릉고개로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항일의 내용을 담은 영화인 나운규(羅雲奎) 감독의 <아리랑>을 이곳에서 촬영함으로써 그때부터 아리랑고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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