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1894-1906)
드레퓌스 사건(프랑스어: L'affaire Dreyfus)은 19세기 후반의 수년 동안 프랑스를 양분했던 정치적 사건이다.
프랑스 육군의 포병대위였던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894년 소령인 페르디낭 에스테라지라는 간첩이 쓴 문건으로 인하여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강제로 불명예 전역된 뒤,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
드레퓌스는 잘못된 증거 자료에 기초를 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실 드레퓌스는 무죄였다.(정보 유출에 사용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 이에 따라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그 이름의 첫글자가 암호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했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고간 것이다.
당시 고급 장교들은 그들의 실수를 덮으려고 사실을 은폐했으며, 반유대적인 가톨릭교회와 보수주의 언론들도 드레퓌스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조르쥬 피카르 중령이 우연한 기회에 진짜 간첩 에스테라지를 적발하게 되었다.
그는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면서 또 다른 간첩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레퓌스는 무죄이며, 진범은 에스테라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그는 참모본부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진범은 무죄로 풀려나고 피카르는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된다.
그의 무죄 주장도 묵살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때 증거자료를 몰래 복사해서 실어 낸 어느 한 신문에 의해 드레퓌스 사건이 세상에 공개된다. 하지만 가장 곤란한 상대는 진범인 에스테라지 본인이었다.
그는 이런 저린 거짓말을 늘어놓고 다녔고, 놀랍게도 참모본부는 그의 거짓말을 눈감아주었다.
작가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유명한 공개편지를 기고함으로써 일반 사회에 그 사건을 폭로한다.(에밀은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 중에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1899년에 귀국한다.)
역사학자 바브라 투흐만은 이를 한마디로 '역사상 위대한 소동'의 하나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여러 지식인과 신문사 르 피가로 등이 에스테라지 범인설을 주장했지만 대부분 언론들은 반유대주의 감정 때문에 '드레퓌스는 죽어라'는 등의 폭언을 일삼았다.
드레퓌스가 악마섬에서 유배되어 있는 동안 프랑스에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그렇지 않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반(反)드레퓌스파로 완전히 양분되었다.
유대인들은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하자 테오도르 헤르츨을 중심으로 하느님이 약속했다는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겠다는 시오니즘운동을 시작한다.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아나톨 프랑스,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등의 수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프랑스 군부와 정부에 대한 비판, 세계 언론과 외교적인 부담이 가중되었고, 1898년 8월, 앙리 중령이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자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지만, 군사법원에서는 10년형으로 형량만 감했을 뿐 유죄판결을 뒤집지는 않았다.
단, 선고 후 대통령이 사면해서 감옥에서는 풀려나왔지만 복권은 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지식인들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1904년에 재심이 청구되었고 1906년에 드레퓌스의 무죄가 선고되어 모든 혐의를 벗고, 복권도 되어 육군에 복직했다.
그 이후 소령으로 승진함은 물론,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고 진급도 하고 일반 군인들처럼 생활하다가 1935년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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