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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숭례문 변고(방화에 즈음하여) 20080212

숭례문! 그 수난과 역사

숭례문과 그 기나긴 역사

숭례문은 조선 시대 때 한양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도성 8문 중 가장 으뜸되는 정문이자,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 숱한 격변기에도 살아남아 조선 전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도 받았다.

지난 600여년간 역사의 주요 현장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수난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왔던 숭례문은 그러나 단 4시간만에 화마에 무너져 내리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파란만장했던 숭례문의 역사를 되돌아봤다.

▲숭례문 창건

숭례문은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짓기 시작해 3년 뒤인 태조 7년에 완성됐다. 조선의 역사와 함께 한 건물인 셈이다. 세종은 1447년에 성곽부분을 높이는 등 더 웅장하게 숭례문을 개축했다. 성종 10년(1479년)에도 큰 보수 공사를 실시됐고 1961년부터 1963년까지 해체된 뒤 수리돼 오늘날에 이르렀다.

숭례문의 현액에는 다른 문들과 달리 세로방향으로 숭례문이라는 글씨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도성을 건설할 당시 풍수지리상 관악상의 모양은 화기를 띄고 있고, 이 화기가 화재를 일으킨다고 믿었다.

숭례문(崇禮門)의 ‘례’는 음양오행 중 불 ‘화’에 해당돼 ‘숭’자로 세로로 배열하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양이어서 관악산의 화기를 불로써 막기 위해 세로로 썼다고 전해진다.

숭례문에서는 조선의 주요 행사가 개최됐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조정 주도로 비를 내리게 해달라는 기우제, 너무 자주 내리는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가 숭례문에서 열렸다.

▲현판 분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이 썼다고 조선 중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명필로 이름을 떨친 안평대군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이 현판은 임진왜란 때 사라졌다가 광해군 때 현재의 청파동 인근 한 개울 도랑에서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임진왜란

임진왜란 때 도성 안에 있던 수많은 건물들이 불에 타고 파괴됐고 현판이 분실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숭례문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때부터 치욕의 역사가 숭례문에 스며들었다.

선조가 도성을 떠난 뒤 용인을 거쳐 북상하던 가토오 키요마사의 군대가 숭례문을 통해 한성에 들어왔다. 일제는 이를 기념해 숭례문을 헐지 않았다.

지난 1934년 ‘조선 고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에 따라 581건의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당시 남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도 있다.

▲구한말

숭례문은 구한말 때부터 성문으로의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1907년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이 서울을 방문하면서 비루한 문을 통과할 수 없다며 문의 좌우를 헐고 지나간 뒤 급속도로 훼손되기 시작했다. 또 전차를 복선으로 확장하면서 좌우측 성벽은 더욱 무너져갔고 주변은 일본식으로 변했다.

이 밖에 시골에서 물건을 팔러 온 사람들과 객주들이 숭례문과 성곽에 그림 광고를 붙이거나 매달면서 숭례문은 계속 훼손됐다.

▲일제 강점기

1920년대에 일제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세우면서 이곳으로 통하는 도로를 낸다며 숭례문 동측 성벽을 완전히 허물었다. 이 길이 지금의 소월길이다.

또 대부분의 성곽은 경성부의 가로정비 사업 시행과 함께 도로가 개설되거나 확장되면서 허물어졌다.

▲한국전쟁

전 국토가 초토화됐던 한국전쟁 때 다행히도 숭례문은 무사했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이 스며드는 것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된 1951년 3월의 숭례문 사진을 보면 누각과 성곽 곳곳에 생채기가 나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63년 이후

해체 수리된 1963년 이후 30여년 가까이 별다른 훼손 사고는 없었다. 그러나 지난 91년 술 취한 50대 남자가 훔친 자동차로 숭례문 철제 출입문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97년에는 30대 남자와 일본인 관광객 2명이 기념사진을 찍는다며 무단 침입하는 과정에서 통제구역 외곽 출입문이 파손됐다.

2002년에는 숭례문의 균열로 문의 아치를 이루는 홍예석 모서리 부분이 일부 떨어졌다. 작년 3월에는 지붕을 장식하는 잡상 9개 중 1개가 사라진 사실이 확인됐다.

▲국보 1호 변경 논란

일제 때 지정된 문화재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때 국보와 보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유지됐다.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국보와 보물에 일련번호를 부착하는 것은 한국과 북한 등 2곳뿐이다.

지난 2005년 11월 정부가 이 같은 지적을 받아 들여 국보 1호 변경 추진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숭례문은 설화를 겪었다. 당시 감사원은 국보 1호만큼은 그 상징성에 걸맞은 문화재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고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국보 1호 교체를 공식화하면서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지난 1월10일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일본 제도를 차용한 문화재 지정제도를 바꿔 국보와 보물 뒤에 붙는 일련번호를 없애는 대신 문화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하위분류번호를 붙이겠다는 새해 업무계획을 발표했다.

이로써 올해 하반기 문화재보호법 개정 등의 입법화 추진을 거쳐 국보 1호 숭례문은 국보 숭례문(건축문화재 제1호)으로 바뀔 예정이었다.


#숭례문 #수난과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