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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도밀약(1965년) --- 2008.7.18

 

엠파스 블러그에서 퍼옴
[현대사 발굴 大특종] 한일협정 5개월전 ‘獨島밀약’있었다
존재여부 논란 속 42년간 미궁 속에 묻혔던‘비밀협정’ 최초 폭로!!!
협상 주역 김종필 前총리의 친형 김종락 최초 증언
“전두환 신군부 등장 직후 밀약 문서 불태웠다”

정일권-고노‘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 항 합의
1965년 1월11일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 자택에서 서명
박정희 재가 뒤, 日側 보안상 美 용산기지에서 전화로 보고
> ‘독도밀약’의 직접당사자 한국과 일본의 ‘7인의 사무라이’ 그들은 누구인가?
> 김종락-종필 형제의 임무. 형은 독도, 동생은 청구권자금 마무리 맡았다
> “친소련 라벨로는 총리 못 된다” 김종락의 직언에 고노 장관 흔들렸다
> 김종락 보고라인은 박정희뿐… 이동원(외무장관)·김동조(주일대사) 배제
> 혁명정부 경협자금 마련 급해 독도문제는 ‘나중에’ 분위기 압도


지난해 6월, <월간중앙>의 요청으로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를 인터뷰할 때였다. 필자는 이야기 도중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독도에 관한 밀약”이라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한일 관계의 최대 걸림돌인 독도문제에 관한 밀약이 있다는 말인가?

그로부터 9개월가량 필자는 극소수 일본인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는 1963~64년 당시 소위 ‘고노-정일권 밀약’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일본 외무장관 고노와 한국 국무총리 정일권이 서명한, 그래서 마땅히 ‘독도밀약’이라고 불러야 할 이 비밀 각서 서명 과정에 개입한 당사자는 모두 7명이었다.

이 ‘7인의 사무라이’는 일본 측에서 고노 이치로(河野一郞·전 건설장관)·우노 소스케(宇野宗佑·전 총리)·나카가와 이치로(中川一郞·전 농림장관)·시마모토 겐로(嶋元謙郞·전 <요미우리신문> 서울특파원) 등 4명, 그리고 한국 측에서 정일권(전 국무총리)·문덕주(전 외무차관)·김종락(김종필의 친형, 전 코리아타코마 사장) 등 3명이었다. 이들 중 현재 살아있는 이는 시마모토와 김종락 두 명이다.

나카소네를 만난 직후 필자는 서울과 도쿄(東京)를 오가며 문서를 섭렵하고 생존한 당사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모를 파악해 현재 책을 집필 중이다. 역사의 그늘에 묻힌 기막힌 이야기의 중요한 줄거리를 특별히 먼저 선보인다.

시마모토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1965년 1월 서울 성북동의 당시 범양상선 회장 박건석의 자택에서 우노 소스케 의원이 정일권 총리에게 독도밀약 문건을 건넸다. 이 문건은 이틀 뒤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확정됐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두 사람 외에 김종락·문덕주 씨와 자신이 자리를 함께했다는 것이 그의 최초 증언이다.

시마모토는 특히 “우노 의원과 나는 이를 급히 알리기 위해 1월13일 용산 미군 정보국에 가서 그 사실을 전화로 고노 이치로 건설장관에게 알렸고, 고노 장관은 그 전화를 받자마자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소식을 기다리던 사토 총리에게 전화를 하는 긴박한 순간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한 김종락 씨의 증언도 시마모토의 말과 일치한다.

“독도 갈등을 풀기 위해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일단 해결로 간주한다’는 아이디어는 내가 냈다. 고노 이치로는 이를 명안이라고 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언명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내는 것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경협자금 확보가 가장 절실했는데, 이로써 두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한 셈이 됐다.”

이어 김종락 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전두환 씨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시끄러운 문제가 될 것 같아 독도밀약 문건을 태워 버렸다”면서 ”거기에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쉬지 않고 정서한 기록들도 포함돼 있어 안타깝다”고 실토했다.

1. 실패하고 만 '독도밀약' 폭로
김종필의 의도된 발언,
통역자 실수로 잘못 전달


2년가량 거슬러 올라가 2005년 6월3일, 한때 일본의 총리를 지명하는 ‘킹메이커’로 불리던 일본 재계의 본산 경제단체연합회 대강당.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강연회가 진행 중이었다.

이 특별한 행사의 두 연사는 한국과 일본에서 총리를 역임한 김종필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35세의 젊은 나이에 박정희를 지도자로 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후 80세가 될 때까지 평생을 한일관계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아온 김종필에게 그 강연회에 대한 감회는 남달랐다.

강연이 끝나자 독도문제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다. 예상된 바 그대로였다.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다케시마(竹島)의 날’을 제정하고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한일 관계에 새로운 풍랑을 만든 지 얼마 안 되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김종필은 어느 한 질문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했다.

“이미 (오래전) 고노 이치로 씨가 한국의 정일권 총리에게 ‘미해결 상태의 해결’을 제창했다. 나도 같은 의견이다.”

고노 이치로라면 총리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1965년 7월8일 사망한 일본의 국무장관 아닌가? 그가 생전에 독도에 관해 당시 한국의 국무총리이던 정일권에게 무언가를 ‘제창’했다는 말인가? 한일 관계라면 내로라하는 식견을 가지고 있던 청중들은 이 처음 듣는 말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80이라는 노령에 든 김종필은 수십 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비밀을 그 자리에서 속 시원히 공개해 버리려고 작심했던 것이다. 밀약에 처음부터 관여한 시마모토 겐로 전 <요미우리신문> 서울특파원은 “김종필과 수일 전부터 아예 예상 질문까지 상정하고 입을 맞추고 준비했다”고 증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하고 만 폭로에 그쳤다. 그 자초지종은 다소 모호하다. 시마모토 겐로의 설명에 따르면 “김종필이 한국어로 답변하고, 통역이 일본말로 통역하는 방식이었는데, 갑자기 나온 중대한 발언에 역사깨나 안다는 전문 통역이 그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찔한 순간이 엉거주춤 넘어갔다.


2. 고노 이치로가 서울에 보낸 밀사&밀서
1965년 1월 12일 밀약 타결...
보안 위해 용산 미군기지에서 일본에 보고


김종필의 폭탄선언은 불발로 그쳤다. 그러나 이미 ‘독도밀약’ 키워드는 세상에 던져진 터였다. 그렇다면 이 폭탄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떠한 밀약이 있다는 것인가?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 한일 국교정상화가 대단원에 다가가던 1965년 1월 초. 고노 이치로는 자신의 비서인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을 서울로 보냈다. 우노의 가방에는 고노가 자필로 쓴 메모가 들어 있었다. 바로 ‘독도밀약’의 초안이었다. 메모의 수신인은 당시 ‘돌격내각’의 수반 정일권 총리.

그러나 정작 우노가 발길을 옮긴 것은 국무총리 집무실도, 공관도 아니었다. 대신 그는 당시 한국을 지배하던 엘리트 권력자들의 저택이 몰려있던 성북동으로 향했다. 지금은 ‘꿩의 바닷길’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는 성북동의 한 언덕에 자리 잡은 당시 범양상선 회장 박건석의 집에서 우노는 정일권을 만났다. 밀약을 추진하기 위해 늘 만나던 장소였다. 물론 처음부터 이 일을 수발한 <요미우리신문> 서울특파원 시마모토도 동석한 자리였다.


우노가 가방에서 꺼낸 몇 장의 A4 용지에는 한일협정의 주요 현안에 대한 일본 측 최종 제안이 들어 있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독도에 관한 메모였다. ‘독도밀약’의 본체는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명제였다. 이것이 바로 김종필이 말한 ‘미해결의 해결’인 것이다. 이 기본 문안과 함께 별도의 종이에는 몇 개의 구체적 사항이 추가된다.<상자기사 참조>

정일권은 이미 수 개월의 준비작업을 통해 합의에 이른 사항을 고노가 자필로 정리한 메모에 서명하고, 그 길로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1월12일, 드디어 일본의 소수 정치인이 ‘고노-정일권 밀약’이라고 부르는 ‘독도밀약’은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다.

다음날인 13일, 우노는 환희에 차서 용산 미군기지로 달려간다. 우노는 그때까지의 모든 협상 과정을 극비로 유지하기 위해 미군 전용선을 통해 ‘오야지’(정치적 대부) 고노에게 전화로 보고해 왔던 것이다.

“오야지, 해냈습니다.”

독도밀약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서울은 더욱 바쁘게 돌아갔다. 1월13일에는 한일협상의 ‘선(先) 국교 수립, 후(後) 현안 타결 방침’을 확정하기 위해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임시국무회의가 열렸다. 이어 14일에는 정일권 총리 주재로 관계장관회의가 극비리에 소집됐다. 1월12일 ‘독도밀약’ 재가에 따른 후속조치다.

3. 의외의 주인공 김종락, 그는 누구인가?
동생 김종필이 맡은 차관 전제조건인
독도문제 해결사로 나서


당시 ‘독도밀약’의 당사자들은 독도에 관한 이 안을 ‘명제안’이라고 칭송했다. 그 안은 유명 정치가 고노 이치로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사안의 가장 핵심 인물이며 생존해 있는 김종락(金鐘珞·87)의 직접 증언에 의하면 이 제안을 낸 사람은 고노가 아니라 김종락이다.

김종락은 누구인가? 김종필의 친형으로 ‘독도밀약’이 만들어질 당시 그는 한일은행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한 뱅커였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일본의 거물 정치인을 상대로 국가 간 영토문제를 비밀리에 협상하고 밀약의 초안을 만들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이 의문은 그가 일본 정치인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던 김종필의 피붙이였으며, 일본인 처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풀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시작된 한일회담은 1965년 한일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모두 7차에 걸쳐 행해졌다. 이 중에서 완고한 반일주의자 이승만의 집권기간에 벌어진 1~5차는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그리고 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틀어쥔 군사정권하에서 이루어진 2라운드의 회담에서 전격적으로 결착나게 된다.

장기 외유 나선 김종필 대체인물로 김종락 낙점

5·16 쿠데타 이후 불과 4년 만에 해결된 한일협상의 공식적인 주요 이슈는 어업협정, 재일 한국인의 지위, 한일 조약의 성격, 문화재 반환 등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젊은 군인들 입장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돈과 땅이었다. 돈이란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절체절명의 과제인 경제개발에 꼭 필요한 일본의 경협자금을 말한다. 땅이란 일본으로부터 돈을 들여오기 위한 협상에서 걸림돌이 되는 독도를 지칭했다.

참으로 엄청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기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나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최대의 관건이 되는 돈과 땅문제가 김씨 성을 가진 한 형제에 의해 처리됐다는 것 말이다.

돈문제를 해결한 것은 김종필. 그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명함을 들고 도쿄로 가서 노회한 정치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을 상대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차관 1억 달러’를 받는다는 내용의 소위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1962년 11월12일 도출해냈다.

문제는 이 돈이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한일협정이 조인돼야 했고, 앞서 걸림돌이 되는 땅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땅문제를 해결한 것이 김종필의 형 김종락인 것이다.

그러면 은행원 김종락은 어떻게 이 땅문제를 담당하게 됐는가? 김종락을 단순히 은행원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종락은 ‘5·16 혁명동지’의 한 사람이다.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 사정을 잘 아는 김종필·종락 형제를 혁명정부의 일본 커넥션으로 신뢰했다. 김종락은 어찌 보면 당시 한일 상층부가 교감하던 에이전트의 자격요건을 잘 갖추고 있었는지 모른다.

1963년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식에 경축 사절단 대표로 온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는 박정희에게 한일 교섭에서 ‘네마와시(막후교섭)’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대통령이 확실히 신임하는 사람,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사람, 통역 없이 충분히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김종락은 이러한 조건을 구비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민간은행의 상무라는 타이틀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1961년 6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젊은 장교들은 한일 국교정상화로 들어오게 되는 청구권자금을 체제 유지의 생명선으로 여겼다. 더욱이 성급하게도 1962년 1월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선포하고 만다. 이는 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당시 돈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일본뿐이었다. 국민의 눈에 일본과의 국교 협상이 일본에 구걸하는 굴욕외교로 비친 것도 이 때문이다.

1962년 11월의 ‘김-오히라 메모’는 그러한 굴욕외교의 표징이 됐다. 대일종속적 군사정권에 대해 쌓이는 한국인의 분노는 드디어 1964년 5월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는 국민성토대회로 터져나왔다. 이어 6월3일에는 1만 명이 넘는 대학생이 굴욕외교 반대 데모를 벌이게 된다.

이러한 사태에 책임을 지고 김종필은 공화당 의장직을 사퇴하고 ‘자의 반 타의 반’ 외유에 나선다. 이는 국교정상화협상을 마무리하려던 일본 자민당에는 신뢰하던 협상 상대자가 증발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김종필이 일본 정계에서 구가하던 신뢰와 인기는 대단했다. 일본 정계의 노인들을 상대로 대담한 협상을 하는 30대 중반의 달변가 청년을 일본 매스컴은 “문학청년풍의 미남”이라고 소개했다. 협상 상대를 잃은 자민당 원로들은 김종필의 뜻과 한치 어긋남이 없으며 김종필처럼 상대하기 편한 대리인을 요구했다. 여기에 뽑힌 것이 바로 그의 형 김종락이었던 것이다.

4. 고노 이치로를 휘어잡은 사나이
김종락 "차기 총리 꿰차려면
친소련 이미지 지워라" 조언


“이래서는 일본의 총리가 될 수 없습니다.”

1964년 11월 하순, 도쿄 오쿠라호텔 7층의 한 스위트룸에서 서울에서 온 한 사나이가 서슴지 않고 고노 이치로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인 11월9일의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당연하리라고 여기던 총리 자리를 사토에게 빼앗긴 고노는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끼던 차였다.

그래도 숱한 정치의 풍랑 속에서 배포를 키워온 고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왜 그런가요?”

“귀하는 친소련 분자라는 라벨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차기 총리 자리를 확실히 굳히는 방법은 반공의 최전선인 한국과의 국교정상화에서 실적을 올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김종락. 한국에서 온 사나이의 이름이었다. 명함에는 한일은행 상무라고 돼 있었다. 김종필보다 여섯 살 위라니 당시 44세. 곧 일본의 총리가 될 66세의 노련한 정치가 고노 앞에서 거침없는 말과 태도를 감추지 않는 이 한국의 은행원과 고노의 연결점은 많지 않았다. 구태여 찾자면 김종락의 일본인 처의 친정이 있는 가나가와(神奈川)현 오다와라(小田原)가 고노의 지역구라는 것뿐이었다.

김종락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당시 고노는 최대 정적인 기시가 자신을 용공주의자로 낙인찍어 궁지로 몰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전에 고노와 가장 가까웠던 <일본경제신문>의 와타나베(渡部亮次郞) 기자는 “둘이 함께 소련과의 국교 수복에 힘썼음에도 기시는 고노를 용공주의자로 부르고, 고노는 기시를 협잡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한일 국교정상화회담이 대단원에 다가가던 1964년 당시 고노는 건설장관이었다. 일본의 재생을 전 세계에 공포해준 그 해의 도쿄올림픽 담당 장관으로서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고노는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로 꼽혔다. 그 결과 고노가 차기 총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고노가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2%가 모자랐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거대한 철의 커튼이 세계를 동서로 나누는 냉전구조가 형성되는 시점에 그가 총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친소련 분자라는 오해를 불식하고 반공의 첨병임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전쟁의 휴유증으로 공산당과의 싸움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이웃나라 한국에서 탄생한 군사정권과 손잡고 웃는 모습을 전 세계에 타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독도밀약은 바로 이 2%의 정수였다.

일본인보다 일본어를 잘하는 이 한국인을 바라보며 고노는 마음속으로 ‘요시, 해보자’고 결심한다. 며칠 후인 12월3일이면 제7차 한일회담이 예정돼 있었고, 이번에는 반드시 한일 국교정상화를 이루라는 미국의 압력이 자민당을 옥죄던 터였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을 끌어들이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5. 또 하나의 작전, 한일 교섭
대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 불구,
혁명세력 한일협정


고노가 내린 것은 정치가의 결단이었다. 그에 반해 협상 상대방인 한국의 군사정권은 결단 수준이 아니라 전투에 임하는 군인의 비장함과 치열함이 있었다. 한일 외교를 외교협상이 아니라 ‘정치협상’ 차원에서 하자는 것은 박정희와 김종필의 기본적 접근 태도였다. 따라서 프로토콜이나 절차보다 임기응변적이고 과감한 행동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한일 협상의 ‘총사령관’이었던 김종필의 어느 ‘방일계획서’는 당시 군사정권의 외교 행태를 잘 요약하고 있다. 1964년 3월9일, 한국의 야당들은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한다. 혁명세력으로는 처음 겪는 ‘잔인한 봄’의 도래였다. 이로부터 10일 후인 19일, 홍콩의 한 고급 호텔에서 박정희의 양팔 격인 김종필과 정일권이 밀담을 나눈다. 김종필이 대만을 방문한 후 도쿄로 들어가 펼칠 작전회의였다.

이 밀담이 바로 김종필의 ‘방일계획서’에 나타난다. 이 계획서에는 5개의 ‘원칙’이 정해져 있었는데, 그 중 원칙 (4)와 (5)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원칙 (4) - 이케다 총리가 한일회담의 타결을 결단내리지 않는 경우 사토·고노 양씨를 이용해 이제까지의 교섭 경위를 폭로하는 등의 전술로 이케다 총리에게 압력을 가한다.

원칙 (5) - 특히 고노 건설장관과는 1차 비밀리에 회합해 생색을 내준다.

그리고 작전계획서대로 젊은 공화당 당의장 김종필은 도쿄로 가서 장기영의 지원을 받으며 자민당 권력자들과 회합한다. 앞으로 한일회담의 주역으로 ‘스카우트’할 수도 있는 고노를 비밀리에 만나 ‘생색’을 낸 것은 물론이다.

6. 시마모토가 심어준 생각의 씨앗
"고노 이치로를 서울로 부르자" 제안...
친구 정치신인이 막후 지원


그렇다면 당시 한국의 군사정권은 어떻게 김종필 대신 김종락을 보내기로 했을까? 그들은 어떻게 김종락을 두고 고노가 눌러야 할 단추라고 생각했던가? 그 생각의 씨는 <요미우리신문> 기자 시마모토 겐로라는 인물이 심은 것이었다.

1964년 5월9일 최두선에 이어 국무총리가 된 정일권은 ‘한일 돌격내각’의 책임자로서 박정희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서라도 한일 협상의 돌파구를 찾아야 할 입장이었다. 지금까지 수면 아래 교섭을 책임지던 김종필이 없어진 답답한 상황에서 그는 ‘정부의 VIP’를 불렀다. 당시 <요미우리신문> 서울특파원 시마모토를 칭하는 별명이었다.

해방 후 최초의 일본인 서울특파원인 그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경성일보> 편집국장이었다. 그런 연유로 시마모토는 세 살 때부터 서울에서 살며 서울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요미우리신문> 특파원으로 서울에 온 그는 당시 통행금지가 있던 삼엄한 시대에 헌병들에게 “시마모토다”라는 말 한 마디로 청와대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특별한 존재로 통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정일권의 질문에 시마모토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자민당에서 오노 반보쿠(大野伴睦)에 이어 당인파를 이끄는 고노 이치로를 서울로 부릅시다.”

이 한 마디가 돌격내각 대일정책의 기본이 됐고, 결국 독도밀약의 씨앗이 된다. 정일권의 부탁을 받은 시마모토는 즉시 도쿄에 있는 선배 와타나베에게 연락한다. 그러나 회답은 부정적이었다. 고노는 절대 서울에 안 간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국내에서 많은 스캔들에 휩싸여 차기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잡음을 극력 피해야 할 입장이었던 것이다.

고노를 한일 협상에 나서게 한 우연한 계기

그런데 그때 와타나베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친우이자 죽은 오노 부총재의 비서였던 정치신인 나카가와 이치로였다. 죽은 오야지의 마지막 작업이었던 한일 관계를 회고하며 서울에 다녀오려고 하는데 비자가 빨리 나오도록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뜻하지 않은 전화는 결국 고노가 한일 협상을 다잡아 쥐게 하는 실마리가 됐다.

오랫동안 오노 반보쿠의 비서로 정치수업을 받아온 홋카이도 출신의 나카가와 이치로는 당시 39세로 국회의원이 된 지 1년의 신출내기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일 관계에 이미 깊숙이 관여한 상태였다. 1964년 1월 중순, 박태준이 박정희의 명으로 한일 협상을 수면 아래에서 보조하기 위해 도쿄에 왔을 때, 오노의 명으로 박태준을 맞은 것이 나카가와였고, 8월 말까지 수개월을 체재하는 동안 두 사람은 한일 관계의 막후협상에 많은 시간을 보낸 터였다.

이러한 나카가와는 오야지가 말년에 정열을 쏟아부었던 한일 관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서울을 방문한다. 이 소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일 교섭을 궤도에 올려놓아야 할 정일권에게는 낭보였다.

젊은 국회의원 나카가와를 위한 만찬은 실로 성대했다. 일본인 정치가가 오면 으레 사용하는 요정 삼청각에는 국무총리 정일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대통령경호실장 박종규 등 권력의 핵심 멤버가 총출동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한 가지. 고노가 한일 교섭에 나서도록 말을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나카가와는 난감했다. 자신의 보스였던 오노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거물 정치가에게 이런 중대한 사안을 전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집요했고, 마음이 약한 나카가와는 서울에서 고노의 자택으로 전화를 한다. 전화기를 타고 들려온 고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전한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이지만, 국회의원은 떨어지면 돼지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이 자네 오야지 아닌가? 외교는 해봐야 선거에서 표가 안 돼. 빨리 돌아와서 선거 준비나 해!”

고노의 말은 차가웠지만 도쿄로 돌아가면 한 번 만나자는 약속은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온 나카가와는 한국인들의 열망을 충실히 전했던 것이다. 나카가와는 고노에게 다리를 놓은 ‘공적’으로 후에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이라는 큰 훈장을 받는다.

서울에서 돌아온 나카가와를 통해 정일권이 전달하는 박정희의 뜻을 들은 고노는 그때까지도 한일 교섭에 나설 결심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름이 지나고 10월 들어 고노의 비서였던 우노와 가이후(海部)라는 두 젊은 의원이 자민당 청년국장 및 학생부장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하는 일이 생긴다. 자민당의 청년 해외 협력대를 만들기 위해 동남아를 도는 일환으로 서울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방한하자 박 정권의 환대와 공세가 극심했음은 물론이다. 이때 정일권은 우노에게 “나의 생명을 걸고 하겠다”고 한일 협상에 대한 의지를 말했다고 전한다. 도쿄로 돌아온 우노의 보고를 들은 고노는 눈을 빛내며 관심을 표명했다. 그 순간 한일 협상의 스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물밑 움직임을 세상은 몰랐다. 1965년 3월15일에 있었던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 이나바 세이치(稻葉誠一) 의원과 고노 건설장관은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을 한 적이 있다.

이나바 - 김종필의 형 김종락이라는 사람이 도쿄에 와서 한 달 이상 힐튼호텔에 묵은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귀하는 와다(수산청) 차장을 불러 하나의 시안을 만들어 이를 우노 의원에게 맡겨 정일권 총리에게 전달한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우노 의원이 정일권 총리와 만난 것이 사실입니까?

고노 - 제가 김종락 씨를 지난해 한 번 만난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만난 일이 없고, 제가 무슨 안을 만들어 정 총리에게 건넨 일은 없습니다.

이나바 - 우노 의원이 정일권 총리를 만난 것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고노 - 우노 군이 한국에 가서 정씨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그 진상을 깊이 알고 있지 않습니다.

오리발의 전형이었다. 사회당의 이나바 의원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고노-우노-김종락-정일권을 하나의 연결선으로 하는 비밀협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모와 깊은 내용을 모를 것이라는 고노는 과감하게 시치미를 떼고, 결국 당시 한일협정을 극구 반대하던 일본 사회당은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만다.

7. 오노와 고다마 요시오가 갈아준 무대
한일 협상은 한국 젊은 정보장교와
일본 늙은 저치인의 합작품


고노 이치로가 한일 협상의 스타가 돼 차기 총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그 무대를 깔아준 것은 그의 정치적 동지 오노 반보쿠였다.

1963년 12월28일. 쿠데타로부터 2년 반이 흐른 이날 박정희는 드디어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때 일본에서 온 경축사절단의 대표는 당시 자민당 부총재였던 오노 반보쿠.

그는 서울 방문 직전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을 기뻐하며 “나와 박정희 씨의 관계는 부자지간과 같은 사이로, 그의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것은 자식의 축하연에 가듯 기쁜 일”이라고 한 발언이 <아사히신문>에 보도된다. 그의 진의가 무엇이었든 이 발언은 당시 한일 관계의 구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한국인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실제로 박정희가 오노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기대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한 예로 1963년 11월5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명의로 오노에게 보낸 친서를 보면 “만추지절에 옥체금안하심을 경하”드린 후 “하온데 한국화일전력주식회사의 변호윤 사장을 소개드리고자 하나이다. 변 사장은 아국 실업계의 유력자로, 민완가로 칭송이 자자한 인재이오니 변 사장 사업에 각별하신 배려를 베풀어 주시옵기 간청드리나이다”라고 돼 있다.

청량리정보학교 출신들 맹활약

한국인 사업가가 일본에 가서 사업이 잘 되도록 자민당 부총재에게 부탁하는 것은 ‘국가재건’보다 ‘로비’에 해당한다. 당시 한일 간의 ‘국가지도자들’ 사이에는 이렇게 막역하게 은혜를 주고받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오노 반보쿠는 일제 강점기에 함경도에서 어장을 경영한 적이 있으며, 한국을 싫어하는 혐한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한국 체류 경험은 가난하고 눌린 조선인들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었는지 모른다. 특히 그는 식민통치가 패망하는 과정에서 한국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한일 협상 당시 그는 관계 정상화를 앞당기려는 한국인들에게는 가장 큰 은인이었다.

그렇다면 이 혐한가 오노는 어떻게 한일 협상의 최대 공로자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김종필의 육사 동기생으로 신뢰하는 정보장교 최영택과, 그가 도쿄에서 공작으로 발굴한 고다마 요시오라는 로비 라인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영택은 ‘혁명주체세력’의 한 사람으로 김종필의 육사 8기 동기생이다. 김종필이 혁명정부 초기 일본에서 로비를 펴는 데 처음부터 끝까지 보필한 것이 최영택·석정선 두 사람이다. 졸업생 1,200명의 육사 8기생 중 상위 30등에 든 엘리트들은 모두 청량리정보학교에서 정보교육을 받은 소위 ‘청정회’ 멤버다.

이들은 김종필과의 남다른 유대 외에 문관으로 전락해 불운의 세월을 보내던 박정희로부터 정보교육을 받았다. 한일 교섭에 동원된 청정회 출신 최영택·석정선·이병희 등은 박정희·김종필의 뜻을 받드는 데 입 안의 혀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이들은 정보장교로서의 훈련을 활용해 일본 정계를 손바닥처럼 파악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한일 국교 교섭은 한국의 젊은 정보장교들과 일본의 늙은 정치인들이 연출한 기묘한 ‘러브 어페어’였으며, 직업외교관들은 이 무대를 꾸미기 위해 고용된 도우미들이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한일 협상을 위한 수면 아래 공작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가는 최영택은 입국부터 이례적이었다. 당시 일본과 국교가 없던 상황에서 비자도 없이 도쿄 외곽 다치카와(立川) 미군기지를 통해 입국한 것이 일본 국회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62년 3월27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는 가와카미(川上貫一) 의원이 다음과 같이 추궁했다.

“최영택이라는 사람은 재일한국대표부의 참사관입니까? 지난해(1961년) 6월15일 박광호라는 사람이 (최영택과) 동일한 사람입니까? 최라는 참사관은 지난해(1961년) 3월 다치카와 기지를 통해 입국한 사실이 있습니까? 이러한 인물이 사실상의 ‘그림자 대사’가 돼 회담을 한다는 것이 정상 상태의 회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당시 외무장관 고사카(小坂善太郞)는 모두 사실이라고 시인한다. 요컨대, 정보장교 출신 최영택은 5·16이 나기 전인 1961년 3월부터 이미 다치카와 미군기지를 통해 일본에 입출국했으며,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달 박광호라는 가명으로 다시 일본으로 입국했으며, 그때부터 ‘그림자 대사’로서 실질적으로 한일 협상을 조정했다는 것이다.

최영택이 최초로 접근한 일본의 수면 아래 공작 대상은 ‘국책연구소’라는 민간 정치 싱크탱크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일본 정계에서 ‘소화 최대의 괴물’이라는 별명을 가진 야츠기 가즈오(矢次一夫)였다. 그러나 이내 한일협정을 돌파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은 당인파의 양대 거두 오노와 고노임을 알게 된다. 이를 알려준 것은 협상의 카운터파트였던 외무성 아시아국장 이세키 유지로(伊關佑二郞)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노와 고노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물음에 이세키는 “고다마상에게 부탁해 보라”고 충고한다. 1962년 3월, 최영택은 고다마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된다. 한일 교섭을 타개하는 데 오노 부총재와 고노 농림장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부탁을 하자 그는 순순히 응했다. 일본 역사상 최대 극우 정치폭력배이자 ‘픽서(fixer)’로 통하는 고다마는 여덟 살이던 1920년 서울에 사는 친척의 손에 맡겨져 경성상업전문학교(선린상고)를 졸업했다. 기묘한 형태의 지한파였다.

그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31세의 나이로 상하이(上海)에서 ‘고다마기관’이라는 이름의 군수물자 조달업체이자 사설 정보기관을 운영했다. 그가 1955년 자민당 창당 자금으로 현금 7,000만 엔, 다이아몬드 한 가마 반, 백금 등 귀금속 20상자를 기부했다는 것은 마치 일본판 몽테크리스토 백작 이야기처럼 지금도 검증되지 않은 전설이다.

김종필이 만난 뜻밖의 행운

최영택이 오노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고다마가 처음 취한 조치는 오노의 총애를 받는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츠네오 기자(현재 <요미우리신문> 회장)와의 식사였다. 아카사카의 요정 치요신(千代新)에서 만난 와타나베 기자는 순순히 협력을 약속했다.

둘은 우선 김종필의 방일 때 오노와의 미팅 주선을 약속했다. 고다마에게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일 협상을 위해 도쿄에 파견된 최초의 주일 대표부대사를 역임한 배의환의 회고록을 보면 “일본 극우세력을 주도하던 최대 두목인 고다마 요시오가 오노의 수하에 있었던 것도 잘 알려진 일이다. 고다마 요시오는 언제나 오노의 뒷문으로 출입하고는 했다”고 썼다.

그해 10월 김종필은 세계도덕재무장운동(MRA) 일본대회에 참가하는 형식을 빌려 도쿄를 찾는다. 오노와의 약속은 10월22일 아침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전날 밤 김종필은 주일 대표부 직원들과 과음을 한다. 말술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김종필이었다.

다음날 아침 숙취로 오노와의 약속시간 30분 전에 깨어난 김종필은 당황해 샤워를 하던 중 들이닥친 오노를 알몸으로 맞게 된다. 이러한 해프닝은 긴장되고 형식적일 수 있었던 만남을 파격으로 전환시켰다. 한국을 싫어하던 오노는 그 자리에서 김종필을 좋아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종필의 행운이었다.

오노와의 만남 이후 외상 오히라와의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김종필은 11월10일 다시 도쿄에 들른다. 이때 요정 치요신에서 김종필은 오노·고다마·와타나베와 다시 만난다. 오노의 방한은 이 자리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김종필의 막후협상은 순조로이 진전돼 11월12일 역사적인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형식으로 대일 청구권자금의 규모에 합의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돈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방해가 되는 독도문제에 대한 마무리는 2년 후인 1964년 겨울에 결판나는 것이다.

8. 겨울 마무리
김종락, 정일권 친서 들고 고노 방문...
한일협정 체결 급피치


박정희의 뜻을 받은 정일권은 1964년 11월 들어 한일 교섭 재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일본 측에, 특히 고노에게 한국 측의 강한 의지를 보여줄 필요를 느낀 것이다.

13일에는 외무부에서 한일회담 재개 훈령이 내려지고, 23일에는 국무총리 정일권이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유효한 것이라는 선언을 한다. 더 이상의 반대 데모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밝힌 것이었다. 이러한 엄호사격 속에서 김종락은 정일권의 친서를 들고 고노를 찾았다. 안내역은 바로 나카가와 이치로였다.

1964년 11월 하순 오쿠라호텔 7층 객실에서 김종락을 만나고 한일 협상의 주도권을 쥐기로 결정한 고노는 즉시 김종락을 자신의 개인사무실로 데려간다. 그때부터 김종락은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고노의 사무실에서 한일 협상의 주요 이슈에 대한 ‘정치결착’의 마무리를 짓는 작업을 했다고 증언했다.

약 3주간의 협상이 진행된 1964년 12월21일. 고노는 정일권에게 ‘국무총리 각하’로 시작하는 서신을 보낸다. 이 서신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들이 들어 있다.

“지난번 우노 중의원 의원을 통해 각하께 저의 사견을 전한 데 대해 김종락 씨를 파견하신 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김종락 씨와는 두 번이나 간담을 하고, 그 뜻은 사토 총리에게도 보고했으며, 사토 총리로부터 만사를 부탁받았음을 김종락 씨에게도 전했습니다. …각하와 저의 대리인, 그리고 각하의 대리인과 제가 신속하게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 측의 고노와 그 대리인 우노, 그리고 한국 측의 정일권과 그 대리인 김종락이 한일협정 체결을 향해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고노와 정일권은 정작 한 번의 대면도 없이 국가 간의 영토문제를 처리하는 밀약을 맺는 기이한 인연이 생겨났다. 12월21일의 서신을 정일권에게 보낸 고노가 반년이 지난 1965년 7월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는 일본 측에서 실질적 총책임을 맡게 된 고노의 방한을 기다리며 정일권에게 “고노 상은 언제 오는가”라고 몇 차례나 물었던 것으로 전한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노는 처음부터 한국과의 국교 교섭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탱크의 엔진도 채 식지 않은 1961년 8월 당시 경제기획원장이던 김유택을 도쿄로 보내 한일회담 재개에 대한 의욕을 전달한다. 이때 김유택이 만난 사람 중에는 당시 농림장관이던 고노가 들어있었다.

농림장관은 이승만 라인과 관련해 납치된 어부, 어장 등 한국과 가장 첨예한 사안들을 다루는 각료였다. 그럼에도 당시 고노는 “우리는 한국에 대해 항상 무거운 채무를 가지고 있다. …새로운 한일 관계는 이토 히로부미식으로 되어서는 안 되고 우방관계로 출발해야 한다”고 하여 한국 방문단을 놀라게 했다.

9. 기시 라인 견제한 고노 파벌
국교정상화 후 일본 경협이익 선점 놓고
신경전 확산


한일 협상을 틀어쥔다는 결정을 내리자 고노 파벌은 이 결정이 구현되도록 총력을 기울인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에서의 위증도, 한국 외교관에 대한 일종의 협박도 사양하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가 있다. 바로 주일 대사로 부임한 김동조에 대한 견제였다.

1952년부터 모두 7차에 걸쳐 벌어진 한일회담의 공식 의제 중 일본 측이 가장 중요시한 것은 어업문제였다. 1965년 들어 벌어진 제7차 회담에서 어업문제를 다루는 양국의 농림장관 교섭이 3월3일부터 도쿄에서 열렸다.

회담에 나선 일본의 농상(農相) 아카기 무네노리(赤城宗德)는 당시 60이 넘은 노회한 정치가로 소련과의 어업협상을 끝낸 베테랑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 대표로 나선 차균희 농림장관은 40대의 학자풍 관료였다. 게임이 안 되는 상대였다. 이를 보다 못한 김동조는 야츠기를 동원했다.

자민당 내의 대만 로비스트로 한국 로비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후나다(船田中) 의원 초청 형식으로 아카사카의 요정 가와사키(川崎)에 모인 자리에서 야츠기는 “차 장관이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일국의 장관인데 아카기 당신이 그렇게 하면 되느냐? 대국적 차원에서 호혜의 정신을 발휘하라”고 야단쳤다는 것이 야츠기 자신의 회고다.

그 흔한 자민당 의원도 아니고, 기시 뒤에서 책사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정치 픽서가 양국 장관을 불러놓고 요정에서 야단치고 국가 간 어업교섭의 교통정리를 하는 기막힌 광경이 연출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충정어린 교통정리는 즉각 제지당한다. 고노 파벌이 볼 때 야츠기가 나서는 것은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시 총리의 개인특사 자격으로 일찍이 1958년 이승만을 방문한 것이 바로 야츠기였다. 그리고 그때 야츠기를 이승만에게 안내한 것이 바로 외무부 직원 김동조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더구나 한일 협상 타결이라는 거대한 승전비가 눈앞에 보이는 시점에서 야츠기가 김동조와 손잡고 도쿄에서 어슬렁거린다는 것은 일본 내 한국 로비의 최고봉이었던 기시-야츠기 팀워크의 부활로 간주하기에 충분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벌어질 경제협력사업의 로비 이익을 생각할 때 이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한일 협상의 주도권을 쥐게 된 자민당의 당인파가 볼 때 신임 한국대사 김동조 또한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신임장을 줄 수 없는 인물)’였다. 그가 비록 한국 기업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무역협회장을 하다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주일대사로 부임했다고 하나, 그는 한일 관계에서 일본의 가장 큰 골칫덩어리인 소위 ‘이승만 라인(한국의 평화선)’을 1951년 초안한 인물이었다.

완강한 반일주의자 이승만이 미국의 반대와 일본의 항의에도 고집해온 ‘이 라인’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그때까지 한국에 구류당했던 일본 어부가 수천 명 아닌가? 이는 일본 정치가들에게 가하는 따귀에 진배없었다. 그리고 독도 역시 ‘이 라인’ 안에 들어가도록 획정돼 있었던 것이다.

기시 노선과 대립하는 자민당 정치가들의 기억에 더 선연한 장면은 1957년 2월 기시가 외상 겸 총리로 취임한 바로 그날 저녁 김동조가 야츠기의 안내로 기시 관저를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날 정문에 포진하고 있던 기자들의 눈을 피해 야츠기가 한국 외무부 국장에 불과하던 김동조를 뒷문으로 데리고 들어가다 부엌에 걸려 있던 기시의 두 살배기 손자 아베 신조의 기저귀에 얼굴이 감겨 애를 먹었다는 일화를 야츠기는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비록 김동조가 규슈(九州)대학을 졸업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일본 후생성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한 일이 있기는 하나 박정희의 복심을 일본 정치가들에게 이심전심으로 전할 수 있는 충분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와사키 요정에서 있었던 야츠기의 교통정리가 있은 뒤 곧바로 김동조는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츠네오의 전화를 받는다. 와타나베는 당시 신문기자이면서 동시에 오노 반보쿠의 참모라고 할 정도로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고노 파벌의 프린스라고 할 수 있는 나카소네 자치장관이 점심을 사려고 하니 힐튼호텔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김동조 회고록의 ‘국내 모 정객’은 김종락

나가 보니 고노의 비서인 우노 의원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야츠기가 참석했던 회합을 거론하며 “어업문제는 사토 총리가 고노 건설장관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니 기시 라인으로부터 손을 떼고 고노 대신과 접촉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김동조는 회고록에서 밝혔다.

어업을 담당하는 농림장관이 따로 있는데 한국 외교관에게 건설장관과 접촉하라는 무리한 논리를 밀고 갈 수 있는 고노파 의원들이었다. 결국 며칠 뒤 김동조와 차균희는 고노의 초청으로 그의 단골 요정인 후쿠히사야(福久谷)에서 만나 간담했으며, 그 결과 공식 어업협상의 의제가 명확히 부각됐다.

김종락이 도쿄에서 활동하던 상황에 대해 당시 주일 대사이던 김동조는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업교섭에는 막후의 여러 갈래 창구가 있었다. 나와 야츠기 및 기시 전 총리, 후나다 중의원 의장으로 이어지는 친한파 그룹, 사토 총리의 전권을 받은 고노 건설상과 국내 모 정객 라인이었다.”

여기서 ‘국내 모 정객’이 바로 김종락이다. 김동조는 당시 일본에서 이를 비밀로 한 채 고심하고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한일 협상에 임했던 일본 외무성의 최고 간부였던 우시바 노부히코(牛場信彦)의 회고록에는 “1964년 12월3일 시작된 제7차 회담 당시 별도 루트의 교섭이 행해지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고노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과 김종필 씨의 루트였는데, 공식 협상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 한국 측에는 상당히 영향이 많은 듯했는데, 김동조 대사는 샌드위치 상태에 있었다. 그래도 그는 일본 측에는 ‘그런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분명히 잘라 말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고노와 김종락의 비밀 협상은 계속 진행됐고,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주일대사 김동조, 외무장관 이동원은 전혀 통보받지 못했다. 그 결과 김동조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빗나간 관찰을 기록했다.

“나는 김종락 씨와 고노파의 중견 우노 소스케가 전관수역 기선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한 사실을 알고 정부에 보고해 손을 떼게 했는데, 일본도 이후에는 정식 루트를 통해 교섭을 진행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이는 자신이 천막 밖에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발언이다.

고노가 김종락과의 비밀 협상으로 한일협정의 독도문제를 포함한 모든 사안에 대한 정치적 타협을 굳혀가고 있을 때까지도 기시-야츠기 라인에서의 견제가 있었으며, 이에 대해 고노는 맹렬히 반발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고노의 자동차에 동승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자로서 밀착취재했던 <일본경제신문> 와타나베 기자는 1965년 3월11일의 일기에서 고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일회담이 순조롭게 진전되지 못하는 것은 한국의 수뇌와 내가 타결한 메모에 방해꾼이 들어선 탓이다. 방해꾼이란 기시 밑에 있는 야츠기 가즈오다. …앞으로 김종락이 오면 대단원이 될 것이다.”

이 기록은 당시 한일 협상 뒤에는 국교정상화로 뜨는 거대한 이권사업에 양국의 정치가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파벌 간의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시 파벌의 야츠기가 개입해 복잡해지는 상황도 “김종락이 오면 대단원”이라는 표현은 고노와의 비밀 협상에 임하는 김종락이 한국의 수뇌, 즉 박정희의 전권을 위임받은 협상 상대자이자 메신저라는 것을 암시한다.

10. 박정희가 정한 데드라인과 口上書
6 · 3사태로 한일협정 조기 종결 박차...
독도 걸림돌 지속


유신을 하고자 했던 박정희에게 김종필이라는 군 후배이자 조카사위는 스타플레이어였다. 그러나 이 스타플레이어는 한일 협상에서의 플레이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1963년 6월 일단 정계를 떠나게 된다.

박정희에게는 청구권자금의 액수가 결정된 이상 나머지 거창하게 들리는 어업 기본조약, 재일 한국인 등의 이슈들은 모두 지엽적인 것들이었다. 독도라는 섬에 대해 무용론·폭파론이 나온 것도 이러한 심리를 배경으로 깔고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한일협정에 장애가 되는 독도에 대한 교섭은 국교정상화 후에 천천히 하자는 것이 박정희와 김종필의 애초의 방침이었다.

1964년의 6·3사태는 박정희에게 큰 심리적 타격을 주었다. 4·19를 목격한 박정희로서는 민중의 소요가 정권을 파괴할 수 있음을 이때 처음 실감했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 제소” 주장 거듭

이승만의 총애를 받다(즉, 박정희의 눈 밖에 있다) 박정희와 가까운 재계 인사들의 추천으로 1964년 주일대사로서 외교가에 컴백한 김동조는, 박정희가 6·3사태를 겪으며 정권의 운명에 대한 위기감 속에서 한일회담의 타결을 ‘1965년 6월까지’ 한다는 데드라인을 정했다고 말한다. 당시 적어도 한국에서는 ‘각하가 원한다’는 것은 절체절명의 과제였고 법칙이었다.

이러한 데드라인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일본 국회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질의와 응답(당시 일본 사회당은 거대정당이었음), 그리고 자민당의 파벌정치 속에서 한일회담이 논의되고 동네북처럼 두들겨맞는 꼴을 군인 박정희는 용납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한일협정의 모든 사안은 1965년 6월까지 가지런히 헤쳐모여야 했던 것이다. 다만 일본의 실정을 무시할 수 없는 이상 장애가 되는 것은 비밀리에 조용히 처리하면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정치문화는 밀약에 대해 친화감이 있어 이미 국내외적으로 다수의 밀약을 해본 터였다. 독도에 대한 밀약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다소 거친 표현으로 요약한다면 박정희 정권에 경제개발을 위한 일본의 자금이 잿밥이었다면, 독도문제는 염불이었다. 따라서 회담의 처음부터 끝까지 독도문제는 ‘나중에’ 처리하고자 했으며, 나중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해서도 명확한 입장이 없었다.

김종필·최영택 등 박정희가 신뢰하는 군 후배 협상가들은 독도문제를 나중으로 미루려고 했던 박 정권의 논리를 협상 일선에서 충실하게 이행하려고 했다. 1962년 9월3일, 일본 외무성에서 있었던 정치회담 예비 절충에서 있었던 이세키(외무성 아시아국장)·최영택(대외직명 참사관)·배의환(한국 측 대표)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중요한 시사를 한다.

이세키 - 청구권자금문제의 해결 가망성 단계에 가면 다케시마에 관한 문제도 토의하게 될 것이다.

최영택 - 독도문제를 왜 또 꺼내려고 하는가? 고노 씨는 “다케시마는 국교가 정상화되면 피차가 가지라고 해도 갖지 않을 정도의 섬”이라는 재미있는 말을 했는데 일본 측이 왜 또 꺼내려고 하는가?

이세키 - 사실상 다케시마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최영택 - 회담 도중에 이 문제를 내놓겠다는 것인가?

이세키 - 그렇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을 정해야겠다.

최영택 - 국교정상화 후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이세키 - 국교정상화 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을 정하자는 것이다.

배의환 - 중요하지도 않은 섬이고 한일회담의 의제도 아니므로 국교정상화 후에 토의한다는 식으로 별개 취급함이 어떤가?

이상의 대화에도 나타나듯 한국 측은 독도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따라서 한일회담에서는 이를 다루지 말고 ‘나중에’ 하자고 졸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나중에’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한국 측은 정해진 입장이 없었던 반면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는 주장을 했고, 이 주장은 한일회담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던 한국 측에 늘 ‘위협’으로 간주됐다.

이러한 한국 측의 입장은 한일회담의 가장 큰 전환점을 함께 만든 오히라와 김종필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1962년 10월20일에 있었던 김종필-오히라 1차 회담의 기록을 보면 “오히라 외상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데 한국이 응해달라고 했음. 김 부장은 이 문제는 한일회담과는 별개 문제이므로 국교정상화 후 시간을 가지고 해결하자고 말했음”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며칠 뒤인 11월8일, 박정희가 도쿄에서 협상을 하고 있던 김종필에게 보낸 긴급훈령에는 “일 측에서 독도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경우 동 문제가 한일회담의 현안이 아님을 지적하는 동시에 일 측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한국민에게 일본의 대일 침략의 경과를 상기시킴으로써 회담 분위기를 경화시킬 우려가 있음을 지적할 것”이라고 명기돼 있다.

군사정권이 독도문제를 의제로 삼기를 거부함에 따라 이는 14년간의 한일회담에서 한 번도 적자 취급을 받지 못하는 꼴이 됐다. 한국은 이미 한국의 고유 영토이므로 의제의 대상이 안 된다는 명분을 숨기고 실제에서는 국교정상화에 방해가 되는 독도문제는 국교수립 후 천천히 논의하자는 편의주의의 양면작전을 구사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독도는 영토분쟁의 대상으로 현안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현안 카드를 14년간의 협상에서 분위기가 불리할 때 수시로 꺼내들고 한국의 입장을 수세로 모는 전가의 보도로 활용했다.

그리하여 1965년 2월20일에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하고 5월17일에 조문화를 거의 완성한 상태에서도 독도문제에 관해서는 결정한 바 없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당시 협상의 한국 측 실무 총책임자인 이동원 외무장관은 도쿄에 집까지 빌려놓고 왕래하며 피치를 올리고 있었다. 6월22일 거행하기로 한 조인식을 위해 6월20일 그가 도쿄에 갔을 때도 독도문제는 아직 미결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독도, 다케시마’라는 지명도 언급하지 않은 채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 형식’이라는 어정쩡한 협정으로 얼버무리기로 낙착된다.

교환공문이란 공문을 주고받자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일 간에 독도에 대해 무슨 공문을 주고받는다는 말인가? 바로 독도밀약에 명기된 대로 각자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이는 형태로는 구상서(口上書·note verbale : 상대국과 협의한 사항을 제기할 때 말로 직접 하지 않고 기록한 문서로 제시하는 외교문서 형식. 수신인의 관직과 성명이 기재되지 않으며, 서명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형식적으로 6월22일에는 일본 외무성이 ‘다케시마에 관한 일본의 구상서’를 보내고, 이에 대응해 11월 6일에는 한국 외무부가 ‘독도에 관한 한국의 구상서’를 보낸다. 그야말로 의미 없는 공문(空文)의 왕래이며, 이는 ‘짜고 치는 고스톱’에 다름 아닌 것이다.

11. 분열 주의 단합, 단합 중의 분열
김종락 보고 라인은 대통령 한 사람뿐...
일본은 파벌 간에도 정보 공유


독도밀약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과정에서 한일 간에 두드러지는 대조를 보인다. 일본의 경우 자민당의 파벌에 따른 내부 분열이라는 상황에서도 형식적으로 내용적으로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외교 사안에 대해 단합하고 있었고, 한국은 그 반대였다.

독도밀약에 관해 당시 그 전말을 소상히 알고 있었던 사람은 박정희·정일권·김종락·김종필, 그리고 문덕주(외무차관) 다섯 사람이다. 그 외의 사람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했다는 것이 김종락의 직접 증언이다. 결국 일본과 국교 교섭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교섭의 공식 플레이어들인 외무장관(이동원)·주일대사(김동조) 등이 이 밀약에 대해 모른 채 일본인들과 협상했다는 것이다.

이는 1964년 4월 정일권 돌격내각이 들어선 이후 한일 교섭에서는 수면 위로 공식적으로 움직이는 정일권 총리-이동원 외무장관-김동조 주일대사의 라인이 있고, 수면 아래로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 박정희-김종락 라인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공식, 비공식의 결합점에 있는 정일권은 비공식 라인의 움직임을 공식 라인에 알리지 않는 양갈래 행동을 견지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로 당시 주일대사 김동조의 회고록에는 도쿄에서 김종락이 행한 일본과의 교섭 내용을 김동조에게 훈령으로 알리는 대목이 나온다.

“정일권 총리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문덕주 외무차관·김종락 한일은행 전무 등이 보는 가운데 쓴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습니다. 그 서신에는 김형욱 부장의 보고에 의하면, 김종락 전무가 앞서 우노 의원과의 면담에서 과거 원용석-아카기 회담에서 일본 측이 요청한 동경 127.7도라는 것은 턱도 없는 것이어서 한국 측은 127.13도를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또한 김종락 씨와 우노 의원 사이에는 제주도 서쪽 수역에 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습니다. …김 대사는 일본 측의 요구에 굴하지 말고, 박 대통령 각하의 훈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바랍니다.”

“한일협정에서는 다케시마의 ‘다’자도 나오지 않았다”

이 글에서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은 한일은행 전무(김종락)가 일본 건설장관의 비서를 상대로 양국의 농수산장관이 해야 할 어업교섭을 행해 그 결과를 중앙정보부를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국무총리는 그 한일은행 전무가 서울에 와서 보는 가운데 서신을 써 도쿄에 있는 대사에게 대통령의 훈령이니 충실히 이행하라고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비밀 협상을 하던 김종락은, 도쿄에 있을 때 모든 보고는 “영감(대통령)에게 직접” 했으며, 보고 방법은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에 전보로 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급한 사항은 직접 서울로 날아와 구두로 보고해 당일치기로 서울-도쿄를 왕복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다.

이 보고 라인에는 국무총리도 외무장관도 올라 있지 않았다. 그들은 어차피 실권이 없는 ‘얼굴마담’들이었던 것이다. 과거 청구권 협상 때 모든 중요 사항이 박정희와 김종필 사이에 결정되었듯, 김종필이 일선에서 몸을 피한 이후에는 박정희와 김종락 사이에서 중요 사항이 결정됐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밀약 과정에 참여하는 당사자 외에서 한국과 공식 협상을 하는 외무대신, 외무성 아주국장 등이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당시 고노를 밀착취재하던 기자들의 기록을 보면 다케시마 문제를 ‘장래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번 협상에서는 일괄타결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따라서 “한일협정에는 다케시마의 ‘다’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또 기자들은 “이 비밀협상은 고노 독단의 작품이 아니라 시나 외상, 사토 총리가 이해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결국 양국 간의 공식 협상에서 일본의 외무대신·외무성 아주국장·주한대사 팀은 카드의 패를 아는 상태였지만 한국의 카운터파트인 외무장관·외무부 아주국장·주일대사는 카드의 패를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일본은 파벌로 갈라져 있으되 서로 의사가 소통하는 유기체였던 반면 한국은 오직 한 사람, 즉 박정희만 모든 것을 알고 그 밑에 있는 인간들은 제각기 독방에 갇혀 옆방의 소식을 모르는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룰을 잘 알고 따르는 자는 권총 사격술 하나만 좋아도 대학교를 보너스로 받을 수 있었으며, 어기는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권력자에 의해 고속도로 위의 주검으로 변할 수 있었다.

12. 종이는 어디에...
"1980년 '신군부 숙정 광풍' 두려워
밀약서 불태웠다" 김종락 증언


지난 1월30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만난 김종락은 건강해 보였으며 인자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김종필보다 여섯 살 위라니 1920년생이다. 만 87세인 것이다. 필자는 모든 것을 초탈해 솔직히 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물었다.

그는 당시 한일은행의 일개 상무(중간에 전무로 진급)로서 왜 독도에 관한 밀약이라는 민감하고도 어려운 일을 맡았던가? 이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영감의 뜻”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영감이란 박정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박정희 생존 당시 ‘각하’라는 호칭 외에는 없는 줄 알았는데, 당시 내부 권력 서클에서 썼던 애칭인 모양이다.

그의 회고는 다시 이렇게 이어졌다.

“44세의 나이에 도쿄로 날아가 총리 자리를 넘보던 66세의 고노에게 ‘당신은 한일회담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총리가 못 된다’는 위협적 발언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돌이켜보면 스스로 믿기지 않는다.”

그는 그 한 마디가 세상을 바꿨다고 믿는 듯했다. 그리고 “당시 혁명동지들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바꾸고자 했으며, 그 모든 것이 영감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는 고노와의 모든 협상 내용을 오직 영감에게만 보고했다. 형식적으로 나중에 서명한 정일권은 ‘고용 총리’였다고 한다. 즉, 총리에게는 보고하지도 않았고 중하게 여기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독도밀약에 대해서는 당시 외유 중이던 김종필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보고는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전보를 보내 직접 영감에게 보고되도록 했다.

그러나 질투와 시기라는 아드레날린으로 움직이는 정계, 특히 권력자의 내부 서클에서 비밀은 없었다. 1962년 7월 박정희에 이어 내각 수반을 역임한 김현철은 김종락 형제와 종씨로 친한 사이였다. 독도밀약에 관해 알게 된 그는 김종락에게 ‘역적’이 될지 모르는 위험한 짓을 왜 하느냐며 걱정 어린 경고를 하기도 했다.

1963년 7월 중앙정보부장으로 부임해 6년이나 권좌에 있던 김형욱은 자신의 기관을 통해 도쿄에서 들어와 영감에게 직보되는 전문 내용을 모를 리 없었다.

정치가도 외교관도 아닌 김종락의 비밀 교섭에 대해 알게 되고, 따라서 불평불만을 말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자 김종락은 위험을 느끼고 영감에게 도움을 청한다. 결국 박정희가 나서서 당시 의문을 가지고 있던 주요 인사들을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의 사저에 모아놓고 “국가를 위해 내 뜻에 따라 하고 있다”고 해명함으로써 김종락은 시기와 모함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부의 갈등과 반목은 있었어도 박정희가 생존해 있는 동안 혁명동지들에게 세상은 편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1979년 10월26일 그가 김재규의 총탄으로 유명을 달리함으로써 혁명동지들이 들어있던 비닐하우스는 걷히게 된다. 그때부터 그들의 눈에 세상은 광풍과 노도의 시대로 차차 바뀌는 것이다.

나카소네 수소문에 바로 말하지 못했던 자괴심

이들은 1961년 쿠데타 당시 육사 생도회장으로서 생도들을 이끌고 지지 행진을 했다는 전두환 소장이 어지러운 사태를 수습하고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취임할 때까지만 해도 새카만 후배가 잘한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두환 소장은 날로 욱일승천해 열렬히 지지했던 선배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1980년 5월이었다. 우선 5월17일에는 합수부가 몇 명의 정치가를 체포한다. 이 중에는 김종필·이후락·박종규 등이 들어 있었다.

김종필의 형 김종락(당시 코리아타코마 사장)은 다음날인 5월18일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연행된다. 6월 들어 김종필은 216억 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공직에서 사퇴한다는 조건으로 46일 만에 석방된다.

이 예기치 않던 광풍노도 속에서 김종락은 독도밀약이 쓰인 종이를 태웠다고 한다. 그 날짜는 밝히지 않았지만 전두환 소장이 이끄는 합수부가 들이닥쳐 가택을 수사하는 시점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필자에게 당시 기록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을 안쓰럽게 토로했다. 비밀협상이 한창이던 때에는 당일치기로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비행기에서 진척 상황을 꼼꼼히 정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1982년 11월27일 나카소네는 일본 총리 자리에 오른다. 총리가 되어 그가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는 다케시마 밀약이 쓰인 종이를 찾는 것이었다. 그가 십수년 전 고노 파벌의 의원일 때 보스였던 고노가 친히 쓴 것이 그 각서이고, 당시의 교섭 과정에 그는 우노·나카가와·와타나베 등 가까운 동료들과 상당한 지원사격을 한 터였다.

나카소네는 한국의 지인들에게 연락해 그 종이가 어디에 있는지 수소문했다. 그 지인들 중 김종필·김종락 형제가 들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1965년에는 복사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당시 보스였던 고노는 이미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아 김종락과 마주 앉아 쓴 각서를 다시 한 벌 베끼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 장의 원본은 김종락이 서울로 가져가 박정희에게 보이고 정일권이 서명한 이후 종적을 감췄다.

그 종이는 어디에 있었던가? 나카소네가 수소문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광풍과 노도가 김종락을 휩쓸고 지나간 2년 후였다. 김종락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 비밀 각서를 전두환의 기세가 두려워 태워 버렸다고 말하지 못했다.

60세의 나이에 새카만 후배들이 닥쳐오는 것이 두려워 역사의 귀중한 기록을 소각해 버렸다는 것을 일본의 총리, 아니 과거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같이 부르며 술을 마시던 일본의 친구에게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한 편에서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종이를 태워 없애야 했던 전후 김종락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가 말하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할까? 아마도 그것은 한일협정이라는 역사의 대업에 참가하고 일을 성사시켰다는 자부심을 스스로 무참히 파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자괴심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노 대니얼
본지 객원편집위원. 정치경제학박사.
최근의 저서로 <우경화하는 신의 나라: 일본 지배세력의 정신세계>
(랜덤하우스, 2006년)가 있음.






노 대니얼_ 월간중앙 객원편집위원 · 정치경제학 박사 [2007년 04월호] 2007.03.29 입력
 
 
[중앙일보 김상진 월간중앙기자] 42년 전 한국과 일본이 극비리에 체결한 '독도밀약'의 실체가 드러났다.

월간중앙은 19일 발매된 창간 39주년 기념 4월호에서 "한.일 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독도밀약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독도밀약은 한.일 협정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맺어졌다.

월간중앙이 한국과 일본의 생존자 증언과 자료를 근거로 추적한 독도밀약은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일 기본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4개 부속조항으로 구성됐다.

부속조항은 ▶독도는 앞으로 한.일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현재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등의 4개 항이다.

월간중앙은 "그 독도밀약은 합의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으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노 의원은 그간 비밀 유지를 위해 이용하던 용산 미군기지에서 일본의 고노 이치로 건설장관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으며, 고노는 이를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던 사토 총리에게 전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김종필 전 총리의 친형 김종락(88.사진) 당시 한일은행 전무였다. 당시 김 전 총리는 한.일 협정 굴욕협상 반대시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난 상태였다.

김씨는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이 독도 문제를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일단 해결로 간주한다'는 아이디어는 내가 냈다"며 "박정희 군사정부는 독도밀약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언명과 함께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당시 요미우리 신문 서울 특파원으로 독도밀약을 위한 정일권-고노 연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시마모토 겐로(80)는 "우노 소스케 의원이 박건석 회장의 자택에서 정일권 총리에게 독도밀약 문건을 건네는 자리에 나와 김종락.문덕주(당시 외무부 차관) 등 세 사람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월간중안은 "한.일 두 나라는 김영삼 정부 때 독도에 새 접안시설을 건설함으로써 약속을 깬 것 외에는 거의 밀약을 준수해 왔다"고 밝혔다.

김상진 월간중앙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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