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천 이야기
보토현(補土峴)과 성북동천(城北洞天) --- 성북동 봄 이야기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 인문역사지리 전문가)의 4월 답사(제25강)는 2014년 4월 20일(일) 열리며,
주제는 <보토현(補土峴)과 성북동천(城北洞天)>입니다.
예부터 ‘자하문밖’과 함께 도성밖 경치 좋은 곳의 으뜸으로 꼽히던 북숭아꽃의 계곡, 성북동천(城北洞天) 일대를 봄나들이
삼아 걸어봅니다.
4월 20일 일요일 아침 9시, 서울 성북구 정릉동 861-1(정릉로 77) 국민대 입구(정문 왼쪽) 에서 모여 출발합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국민대학교 앞→보토현→하늘마루→호경암→성북동천 발원지→성북동천→삼청각→대사관저길
→심우장→간송미술관→상허 이태준가→선잠단지→점심식사 겸 뒤풀이(의정부돌솥부대찌개집)
→길상사→성북동 골목길→정릉→아리랑고개→흥천사(신흥사)→성신여대역
<보토현과 성북동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그 산줄기를 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분수령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한북정맥(漢北正脈)으로 이어지고
삼각산 영봉(靈峰)에 이르러 정맥의 본줄기는 서향하여 노고산 지나 장명산에서 서해로 숨어듭니다.
다른 한 줄기는 남쪽으로 그 방향을 돌려 삼각산 즉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일구고
보현봉(普賢峰)에 이르러 동남향하면서 형제봉(兄弟峰)과 구준봉(狗蹲峰)을 지나 마침내 한양(漢陽)의 주산(主山)인
북악(北岳)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산줄기의 흐름을 풍수지리적으로는 내룡(來龍)이라고 하는데
산의 기운이 산줄기[龍]의 뻗침과 함께 전해져 온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헌걸찬 정기가 산줄기의 뻗음을 타고 한양의 주산인 북악에 와서 맺혀
그 기운을 한양 도읍에 불어넣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봉에서 북악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양 도성으로 들어오는 들머리[入首]에 해당되는
보토현(補土峴)에서 크게 내려앉아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있어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였습니다.
이에 나라에서는 세검정에 있었던 총융청(摠戎廳)에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특별한 날을 잡아 백성들을 동원하여 내려앉은 곳에 흙을 퍼다 날라 돋워줌으로써 산의 기운이 원활하게 이어져
전해지도록 하였는데, ‘흙을 보충한 고개’라는 뜻으로 이곳을 보토현(補土峴)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더욱 북돋워주어야 할 보토현 아래에 북악터널이라는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으니
좋은 기운이 서울 장안까지 펼쳐지기는 이젠 글렀는가 봅니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인왕산(仁王山)의 살구꽃,
서대문밖 서지(西池)의 연꽃,
동대문밖 동지(東池)의 수양버들,
세검정 근처 탕춘대(蕩春臺)의 수석(水石),
그리고 성북동의 복숭아꽃[北屯桃花] 구경을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아쉽게도 서지의 연꽃과 동지의 버드나무, 그리고 탕춘대의 수석은
그 자취를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연못은 평지가 되고 계류는 복개되어 원형 복원이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인왕산과 북둔 일대는 지금도 찾는 이들이 있으니,
서울시가 이곳에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어 옛 정취를 살려보려는 노력을 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도성의 수비는 3군문(三軍門)인 훈련도감(訓練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이 맡았고
도성밖의 수비는 북쪽은 총융청이, 남쪽은 수어청(守禦廳)이 맡았는데
총융청의 한 주둔지가 성북동천 상류에 있어 이곳을 북둔이라 불렀습니다.
북둔 일대는 복숭아나무가 많아서 홍도동, 도화동, 복사동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복숭아나무는 보이지 않고
그 명칭이나마 동명(洞名)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북동천 상류에 자리잡은 삼청각(三淸閣)과 대원각(大苑閣)은
군사독재 시절, 권력자와 기업 총수들이 서로 만나 정경유착의 야합을 하던 요정이었습니다.
삼청각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음식점과 예식장으로 변했고 대원각은 주인이 법정(法頂)스님에게 기부하여
지금은 길상사(吉祥寺)라는 멋진 도심 속의 사찰로 바뀌었습니다.
대원각의 소유주였던 김영한(1916-1999)씨는 16살 때
조선권번(朝鮮券番)에서 궁중아악(宮中雅樂)과 춤과 노래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깨끗하고 청정한 물은 잡스러운 내음을 풍기지 않는다”는 ‘진수무향(眞水無香)’에서 따온
진향(眞香)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월북시인 백석(白石, 1912-1995)과 사랑에 빠져
그로부터 중국 전설 속 여인의 이름인 자야(子夜)라는 아명(雅名)까지 받았으며
1953년에는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소유>라는 책을 통하여 법정 스님을 알게 되어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고
법정 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이런 연유로 길상사라고 절 이름을 지었습니다.
기생 진향이로, 백석의 연인 자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가진 것을 모두 보시하고 몸은 화장하여
길상사 뒤편 언덕에 산골(散骨)하였으니
그야말로 정신적인 스승인 법정 스님의 가르침인 ‘무소유’를 철저히 실천한 것 같습니다.
길상사는 본래 요정이었기에 가람 배치가 전통사찰과는 사뭇 다릅니다.
기존의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입구에 식당을 겸한 편의시설만 새롭게 지었습니다.
대원각의 본채는 지금 길상사의 금당에 해당하는 극락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사찰 마당 한 켠에 세워진 성모 마리아 닮은 보살상도 눈여겨 볼만한 조각품입니다.
그 맞은 편에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북향(北向)을 한 독립지사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 1944)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이
조촐하나마 의기(義氣)가 서린 아담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만해는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창덕궁 옆에 있는 작은 한옥에서 기거하면서 <유심(惟心)>이라는 잡지를 간행하며
3.1만세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으나 노년에는 지인이 집을 새롭게 지어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한
성북동천에 있는 심우장에서 생활하다가 결국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한 채 광복 1년 전 숨을 거두고
지금은 망우리 독립열사묘역에 부인과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심우장에는 만해의 <오도송(悟道頌)>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이 거침없는 그의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장부는 가는 곳마다 고향이거늘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사람들은 시름 속의 나그네로 오래도록 보내네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한소리 큰 할로 삼천 대천세계를 깨뜨리니
설리도화편편비(雪裏桃花片片飛) 눈 속 복사꽃잎이 펄펄 날리네
성북동천이 한양도성의 바깥쪽을 휘감고 돌아가는 곳에서 선잠단지(先蠶壇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선잠단지는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를 많이 생산하기 위해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를 배향하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왕비가 친히 행차하여 양잠(養蠶)의 시범을 보여주던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풍요로운 먹을거리[食]와 입을거리[衣]를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는 행사에
왕과 왕비가 직접 나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왕은 전농동(典農洞)에 있는 선농단(先農壇)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행사(親耕行事)를,
왕비는 성북동천 아래에 있는 선잠단(先蠶壇)에서 누에치는 시범을 보이는 친잠행사(親蠶行事)를 주관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노동력이 늘어날 것이고 늘어난 노동력만큼 생산도 많아져
백성들의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풍요롭게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선잠단 사이로 난 골목 안쪽에 있는 성락원(城樂園)은 철종(哲宗)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이었으며
의친왕 이강(李堈)이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성락원은 자연적 지형을 잘 이용한 별장으로 생활(生活), 수학(修學), 수양(修養)의 기능을 하는 앞뜰과
후원(後園)의 역할을 하는 뒤뜰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롯한 행서체(行書體)의 좋은 글씨가
바위에 많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사유지로서 일반인의 관람이 불가능하여(예약제로 관람가능)
전해지고 있는 낡은 사진으로만 그 일면을 엿볼 수밖에 없습니다만
최근 성락원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일반인의 관람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성북구청과 소유주간에 깊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지금은 복개되어 그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성북동천에 놓여 있었던 쌍다리를 지나서 만나게 되는
간송미술관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이 전 재산을 투척하여 건립한 사설 미술관으로서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전형필 선생은 종로에서 아흔아홉 칸의 대부호 집에서 태어나 휘문고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일본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문화재가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미술품과 문화재의 수집과 보존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하여 서화(書畵)뿐만 아니라
석탑, 석불, 탱화 등의 문화재를 수집 보존하는데 힘썼으며
1966년에 보화각을 그의 호를 따서 간송미술관으로 개명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이곳은 문화재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만 특별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에는 국보 70호인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原本)을 비롯한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그리고 겸재(謙齋) 정선(鄭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작품 등
5천여 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월북작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1904~?)의 고택은
1933년에 지어진 대지 약 120평, 건평 약 23.2평 규모로
좌향은 서남향이고 별채 없이 사랑채와 안채를 결합한 본채로만 이루어져 있는 개량한옥입니다.
그가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 당호(堂號)를 짓고 1933년부터 1946년까지 거주하면서
단편 <달밤> <돌다리>, 중편 <코스모스 피는 정원>, 장편 <황진이> <왕자 호동> 등 문학작품 집필에 전념한 곳입니다.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1921년 휘문고보(徽文高普)를 졸업하고,
1927년 11월 일본 상지대학(上智大學)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1925년 <시대일보>에 <오몽녀(五夢女)>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1933년 박태윤ㆍ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를 조직하여 동인활동을 통해 계속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처럼 이태준은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선구자로서 소설가였지만
<문장강화(文章講話)>라는 문학 개론서를 내놓기도 하였으며,
1946년 6월쯤 월북하여 1953년 임화(林和), 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복개되어 자동차 도로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하였던 성북동천에 기대고 있는 마을들은
물줄기를 경계로 해서 남쪽과 북쪽이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양도성밖 북쪽 성벽에 기대고 북향을 하고 사는 남쪽마을은
서민들의 삶이 물씬 풍기는 60, 70년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반면에,
구준봉(狗蹲峰) 아래 양지바른 언덕에 둥지를 틀고 남향을 하고 사는
북쪽마을은 재벌 회장들의 대저택이 들어섰었는데
그 재벌들이 목멱산(木覓山) 남쪽 기슭인 이태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지금은 외국대사들의 저택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가까운 곳에 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한 외교타운도 세워져 있습니다.
1970년대 당시 소위 ‘도둑촌’이라 불렸던 이곳에
재벌 회장집들이 들어설 때 현지 주민들의 내몰리는 모습을 비둘기에 빗대어
노래한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는 그때의 광경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최근 뉴타운 개발로 쫓겨나는 서민들의 신산스런 삶으로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중략-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성북동천은 북악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줄기의 북쪽사면과 구준봉에서 동쪽으로
미아리고개 지나 고려대 뒷산인 개운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북쪽사면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입니다.
그래서 성북동천을 지나 북으로 정릉쪽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북악스카이웨이’라 부르는 구준봉에서 개운산에 이르는 산줄기를 넘어야만 합니다.
지금은 대사관저 거리로 변한 성북동 골목을 지나 북악스카이웨이에 올라서 배나무 과수원이 늘어서 있었던
국민대 건너편 배밭골을 왼쪽에 두고 산줄기를 타고 조금 걸어가면
아리랑고개 못 미쳐 북쪽 기슭에 정릉(貞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이자 조선왕조의 최초의 왕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으로,
본래 경운궁(慶運宮) 서쪽 지금의 주한미국대사관저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그때의 석물(石物) 일부가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태조의 신덕왕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으면
그의 묘를 사대문 안에 두고 그 동쪽에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인 흥천사(興天寺)를 지금의 서울시의회(과거 국회의사당)쯤에 170여 칸 규모로 지었겠습니까.
그러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소생들과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등 개국공신들을 참살(慘殺)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분묘(墳墓)는 지금의 이곳 정릉으로 이장시키고 정자각(丁字閣)은 헐어버려
그 목재와 석재를 가까이에 있는 중국 사신이 머무는 북평관(北平館)의 북루(北樓)를 짓는데 썼고
신장상(神將像)이 새겨진 병풍석(屛風石)은 홍수로 떠내려간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로 다시 놓는데 쓰게 하였습니다.
그 병풍석은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지하에 묻혀 있다가
청계천 복원공사로 훤히 그 모습을 드러내 지금은 청계천 광통교 밑에 가면 언제라도 볼 수가 있습니다.
큰 규모로 지어진 흥천사도 정릉의 이전에 따라 아리랑고개 초입에 작은 규모로 옮겨져
한때는 회갑잔치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신흥사(新興寺)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최근에 본래의 이름인 흥천사를 되찾았습니다.
아리랑고개는 정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넘어야만 하는 고개이기에
본래 정릉고개로 불렸는데 일제강점기에 항일의 내용을 담은 영화인 나운규(羅雲奎) 감독의 <아리랑>을
이곳에서 촬영함으로써 그때부터 아리랑고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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