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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간송(澗松) 전형필-이충열작가의 강연을 듣고

간송(澗松) 전형필-이충열작가의 강연

기억이 나지 않은 수년전에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전기를 읽은 기억이 새롭다.

이충열 선생님이 쓰신 전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쓴 책이 없다면 아마도...

 

2014. 4.11(금). 08:00, 수요포럼에서..............

이충열 작가님의 열정적인 열강을 감동적으로 들었다.

이충열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그요약을 이곳에 올린다.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신’ 간송 전형필

  이충렬(전기작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그는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 민족의 자존심과 존엄을 지키고 되찾는 일이라고 생각한 선각자였다.

그런 선각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되던 옛 그림과 고려청자, 조선백자, 삼국시대 불상, 귀한 활자로 만든 책 등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재를 지켰다.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꼭 찾아와야 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값을 따지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지키고 되찾아왔기에, 그는 문화 독립 운동가였다.

그는 이렇게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성북동에 최신 시설의 미술관을 세우고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보화각葆華閣’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간송미술관이다.

 

간송 전형필이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인사동에 있던 한남서림을 인수한 1932년 전후다.

그의 나이 불과 26세,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다. 화가도 아니고 문인도 아니고, 와세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그가 어떻게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갖고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것도 평범한 수집이 아니라, 우리 문화유산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국보급 문화재들을. 그가 수집한 서화만으로도 조선시대 미술사를 서술할 수 있고, 그 반대로 그가 수집한 서화가 없으면 미술사를 온전히 서술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어떻게 모은 것일까?

 

그의 곁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우리나라 역사소설의 선구자인 월탄 박종화가 그의 이종 사촌형이었다.

간송 전형필은 어린 시절부터 그를 통해 우리나라 역사와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또 한 사람은 3.1 만세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명이자, 당대의 감식안이자 수집자였던 위창 오세창이었다. 그는 오세창을 스승으로 모시고 안목과 감식안을 전수받았다.

 

주변에서 조언자와 스승을 찾느냐 못 찾느냐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는 혜안과 성찰을 배우느냐 못 배우느냐는, 개인의 능력과 열정에 달려있다. 간송 전형필에게는 그들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고, 그들에게 배움을 청하는 열정이 있었다.

 

그는 박종화의 영향과 오세창의 가르침을 통해, 일제감정의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실천했다.

그래서 그의 수집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그것이 다른 수집가들과 다른 점이다.

미술사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수집이었기에 체계가 있었고, 중요한 것을 모으다보니 아름다움은 자연히 얻어졌다.

 

수집은 열정과 의지만 있다고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간송 전형필은 대학 3학년 때인 192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약 4만 마지기(수확량 2만 석)의 논을 상속 받았다.

당시 만 석을 수확하는 논의 가치는 서울의 8칸짜리 기와집 천 채 값이었다. 일제강점기 화폐단위로 백만 원이었고, 그래서 만석꾼을 ‘백만장자’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만 석 이상의 재산을 가진 조선인은 43명뿐이다. 그런데 그는 2만석을 수확하는 논을 상속 받았으니 서울의 좋은 기와집 2천 채, 요즘 집값으로 환산하면 최소 6,000천억 원의 재산가가 된 것이다.

매년 수확하는 쌀을 기와집으로 계산하면 기와집 150채였다. 연 수입은 요즘 가치로 약 450억 원 정도였다. 가히 하늘이 내린 재산이었고, 백만장자 중에서도 상위에 속했다.

그러나 재벌급 부자가 된 청년 전형필은 사업을 하거나 유유자적 편안하게 사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인 오세창이 지은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을 보면서, 신라시대 솔거부터 조선 말 철종 때까지 1,117명의 서화가에 대한 옛 감식안(鑑識眼)들의 품평을 공부했다.

그중 훌륭한 품평을 받은 화가가 있으면, 역시 오세창이 엮은 옛 서화가들의 화첩인 《근역화휘(槿域畵彙)》(현재 간송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분첩 소장)에서 그들의 작품을 눈여겨보면서 안목을 높여갔다.

 

오세창은 그런 청년 전형필에게 깊은 산 속에서 흐르는 산골 물 ‘간(澗)’ 자, 와,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 문장에서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소나무 ’송(松)‘ 자를 합해 ‘간송(澗松)’이라는 아호를 만들어줬다.

 

어느 정도 안목이 생긴 간송 전형필은 인사동에 있는 한남서림을 인수해 고서화와 옛 책 수집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수집을 시작하였다.

친일파 송병준의 집 아궁이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 한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을 비롯해 우리나라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인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해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보다 40점이 많은 161점을 모았다.

겸재로부터 조선시대 화가들의 작품 소재와 화풍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겸재에 대한 평가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는 훗날 달라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혜원 신윤복의 조선시대 말기의 풍속화 30점이 담겨있는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을 기와집 40채 값을 주고 일본에서 구입해서 우리나라로 갖고 왔다.

그뿐 아니라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미인도》도 소장했다. 현재 심사정의 작품도 많이 수집했다. 조선시대 꽃나무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초충도 화첩인 《현재첩》을 비롯해 길이 8미터에 달하는 《촉잔도》를 구입해서 복원 수리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대로 구입비로 기와집 5채 값, 수리비로 6채 값을 지불했다.

조선시대 작품 중 흔치않은 대작이기 때문이었다. 단원 김홍도의 흔치 않은 강아지와 고양이 그림도 구했고, 관아재 조영석의 풍속화도 수집했다.

 

그는 당시 값이 너무 비싸 조선인 수집가들이 엄두를 못내 일본으로 유출되던 청자 수집에도 큰 공을 기울였다.

1935년에는 기와집 20채 값을 주고 학이 69마리 새겨진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을 소장했다.

얼마 후 일본인 수집자가 기와집 40채 값을 제시했지만, 그는 그 국보를 지켰다.

 

1937년에는 일본에 거주하던 영국인 수집가 존 개스비의 고려청자 20여 점 일괄 인수하기 위해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처분했다. 기와집 400채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다.

요즘 가격으로 환산하면 최소 1,200억 원이다. 당시 구입한 고려청자 중 7점은 광복 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다.

 

청자 기린형 향로(국보 제65호), 청자상감 연지원앙문 정병(국보 제66호), 청자 오리형 연적(국보 제74호), 청자 원숭이형 연적(국보 제270호), 백자 박산향로(보물 제238호),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보물 제286호), 청자 상감 모란당초문 모자합(보물 제349호)이 그때 일본에서 되찾아 온 청자들이다.

 

간송 전형필은 경성 미술구락부 경매에 좋은 서화나 도자기가 나오면 참가했다.

기와집 16채 값에 낙찰 받은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채 난국초충문병’(국보 제294호)을 비롯해 청화백자 동자조어문병,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 중 한 점인 예서 대련(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와 오이·생강나물이고,  좋은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가 모여 있는 것이다) 심사정의 <성난 매가 꿩을 노려보다>, 변상벽의 <병아리를 거느린 암수탉>, 정선의 <고사관폭도高士觀瀑圖> 등이 경매를 통해 수집한 작품들이다.

 

그는 이렇게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1938년 성북동에 최신 시설의 미술관을 세웠고, 스승인 오세창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보화각葆華閣’이라고 이름 붙였다.

 

간송 전형필의 수집품 중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긴 문화재는《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이다.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이 바로 간송 전형필이 기와집 10채 값을 주고 구한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현재까지로는 유일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집현전 학자들이 그 사용법을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언어를 만 든 후 그 사용법을 설명한 책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일해서, 1997년 10월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해방이 되었지만, 전형필은 고적보존위원으로 위촉되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정리․보존하는 일에 참여하느라,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정리하고 박물관을 개관하는 일은 훗날로 미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보화각에도 북한군이 들이 닥쳤고, 그들은 그곳에 있던 국보급 문화재를 전부 북쪽에 빼앗길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포장할 사람으로 불려온 국립박물관 최순우 학예관과 수집가이자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의 포장지연 작전으로 극복했고, 서울 수복 후 다시 전황이 불리해지자 주요 소장품을 부산으로 옮겼다.

그러나 미처 피난 보내지 못한 소장품들을 대부분 도난당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후, 간송 전형필은 미술사학자들과 함께 남은 소장품들을 정리하며 보다 규모 있는 박물관을 구상하던 중 갑작스레 닥쳐온 병마로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하다가 1962년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간송 생전에는 간송미술관이 일반 국민들에게 개방되지 못했다.

그 후 후손들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장이자 간송 전형필의 제자인 최순우를 비롯한 여러 미술사학자들의 도움으로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1966년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 출신의 미술사학자 최완수를 영입했고, 그를 중심으로 간송 수집품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와 학문적인 연구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71년 가을부터 2013년까지 매년 5월과 10월 중순에 2주씩 소장품 전시회를 열었지만, 1930년대에 지은 간송미술관은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관람객을 맞기에는 한계점에 도달해 2014년에는 동대문디자인 플라자에서 첫 외부 전시를 기획했다.

간송 전형필은 수많은 일본인 수집가들 틈에서 과감한 결단력과 민족애를 앞세워 수집한 문화유산은 광복 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 중 12점이 국보로, 10점이 보물로, 4점이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나머지 수집품 5천여 점도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학계의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많은 이가 간송 전형필을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신’, 간송미술관을 ‘민족 문화유산의 보물창고’라고 부른다.

 

 

 

| 간송 전형필 연보 |

 

- 1906. 7. 29. 서울 종로구 종로 4가 112번지에서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전영기全泳基와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이의 차남次男으로 출생. 본관本貫은 정선旌善.

 

- 1921. 3. 어의동 공립보통학교 졸업.

 

- 1926. 3. 휘문 고등보통학교 졸업.

 

- 1930. 3.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 졸업.

   귀국 후 위창 오세창 선생의 조언을 받으며 문화재 수집 시작.

 

- 1932~1934. 고서화와 옛책을 수집하기 위해 인사동(관훈동) 소재 한남서림 인수.

   친일파 송병준의 집 아궁이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한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 구입, 수장.

   일본 오사카 경매에서 ‘3층 석탑(서울특별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28호)’, ‘고려 3층 석탑’, ‘석조 사자탑’, ‘조선 석등’을 낙찰받아 국내로 되찾아옴.

   일본으로 반출되기 직전의 고려시대 ‘괴산 팔각당형 부도(보물 제579호)’를 인천항에서 구입했으나 총독부에 압수당함. 훗날 보화각(간송미술관)으로 찾아옴.

 

- 1934. 성북동에 북단장 개설.

 

- 1935.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 구입, 수장.

 

- 1934~1936.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을 일본에서 구입, 수장.

  심사정의 대작 <촉잔도>(58×818cm)를 구입, 복원수리, 수장.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채 난국초충문병(국보 제294호) 수장.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다수 구입하여 수장.

 

- 1937. 일본에 거주하던 영국인 수집가 존 개스비의 고려 청자 20여 점 일괄 인수.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처분해서 구입했는데, 당시 시세로는 경성의 번듯한 기와집 400채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다. 요즘 서울 시내 아파트 가격으로 환산하면 최소 1,200억 원이다. 당시 구입한 고려청자 중 7점은 광복 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다. 청자 기린형 향로(국보 제65호), 청자상감 연지원앙문 정병(국보 제66호), 청자 오리형 연적(국보 제74호), 청자 원숭이형 연적(국보 제270호), 백자 박산향로(보물 제238호),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보물 제286호), 청자 상감 모란당초문 모자합(보물 제349호).

- 경성 미술구락부의 ‘송은 이병직 소장품 경매’에서 여러 점을 낙찰받았다. 청화백자 동자조어문병, 심사정의 <성난 매가 꿩을 노려보다>, 변상벽의 <병아리를 거느린 암수탉>, 정선의 <고사관폭도高士觀瀑圖>,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 중 한 점인 예서 대련(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 1938.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사설) 박물관인 보화각 개설.

 

- 1939. 정선의 <통천문암通川門岩> 수장.

추사 김정희의 그림에 흥선 대원군이 제문題文을 쓴 <지란병분> 수장

백자 연적을 집중적으로 구입 수장.

 

- 1940. 3. 한남서림 증축, 확장.

 

- 1940. 4. 대수장가였던 박창훈의 소장품 경매에서 추사 김정희가 첫 글자를 쓴 후 30년 만에 완성한 예서 현액 <침계>를 낙찰받아 수장.

 

- 1940. 6. 재단법인 동성학원東成學園 설립, 이사장에 취임. 보성중학교 인수.

 

- 1943. 《훈민정음》(해례본, 국보 제70호) 수장.

 

- 1945. 6. 보성중학교장 겸임.

 

- 1946. 9. 보성중학교장 사직.

 

- 1947. 고적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피촉.

 

- 1954. 문화재보존위원회 제일․이분과 위원으로 피촉.

 

- 1956. 1. 교육공로자 표창.

 

- 1960. 8.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 발기.

 

- 1962. 1. 26. 서거

 

- 1962. 8. 18. 대한민국 문화포장 추서.

 

- 1964. 11. 13. 대한민국 문화훈장 국민장 추서.

 

- 1997. 10. 유네스코UNESCO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국보 제70호)을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

 

 

 

| 간송 수집품 중 지정 문화재 목록 |

 

   * 문화재명은 문화재청의 표기에 따름

 

- 국보 제65호 청자기린유개향로靑磁麒麟鈕蓋香爐

- 국보 제66호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靑磁象嵌柳竹蓮蘆鴛鴦文淨甁

-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 국보 제70호 훈민정음訓民正音

- 국보 제71호 동국정운 권1, 6東國正韻 卷一, 六

- 국보 제72호 금동계미명삼존불金銅癸未銘三尊佛

- 국보 제73호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

- 국보 제74호 청자압형수적靑磁鴨形水滴

- 국보 제135호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 국보 제149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 국보 제270호 청자모자원형연적靑磁母子猿形硯滴

- 국보 제294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靑華白磁鐵砂辰砂菊花文甁

 

- 보물 제238호 백자박산향로白磁博山香爐

- 보물 제283호 금보琴譜

- 보물 제284호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 보물 제285호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 보물 제286호 청자상감포도동장문매병靑磁象嵌葡萄童子文梅甁

- 보물 제287호 분청박지화문병粉靑剝地花文甁

- 보물 제348호 분청사기모란문반합粉靑砂器牡丹文飯盒

- 보물 제349호 청자상감모자합靑磁象嵌母子盒

- 보물 제579호 괴산외사리석조부도槐山外沙里石造浮屠

- 보물 제580호 전문경오층석탑傳聞慶五層石塔

 

- 서울시지정문화재 제28호 삼층석탑三層石塔

- 서울시지정문화재 제29호 석조팔각승탑石造八角僧塔

- 서울시지정문화재 제30호 석불입상石佛立像

- 서울시지정문화재 제31호 석 비로자나불좌상石 毘盧舍那佛 坐像

 

 

 

 

이충렬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6년 대학 재학 중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1994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림애호가로 가는 길》,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등이 있다.

 

 


#간송미술관 #간송 전형필 #이충열 작가 #간송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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