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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모택동 사망 --- 1976. 9. 9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사망 --- 1976. 9. 9

1893년 12월 26일 중국 후난성에서 태어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주도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애연가로 알려져 있다.

죽기 2년 전인 81세까지 하루에 40개비에서 60개비쯤 피웠다고 한다. 그에 관한 글이나 사진을 보면 손엔 언제나 담배가 들려 있다. 담배를 피우면서 그는 현대 중국의 큰 그림을 그려나갔다. 18세 소년이 처음 담배를 피우던 즈음 중국은 신해혁명의 격랑에 있었고 소년은 혁명군 소속의 한 부대에서 사병으로 6개월을 보내면서 중국의 변화를 몸으로 체감했다.

 

28세, 흡연 10년차에 그는 마르크스 사상에 기반한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가 열렸는데, 이때부터 공화국 건국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있던 사람은 마오쩌둥 외에는 단 1명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혁명운동 중에 죽거나 변절했다고 한다. 그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라 농민이야말로 중국의 역사를 다시 쓸 주인공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1931년 그는 중국 공산당 주석으로 취임했고 34~35년 대장정을 거치면서 확고한 지도력을 확보했다.

그가 담배를 가장 많이 피운 시기는 국공합작이 깨진 뒤 내전이 벌어졌을 당시로 알려져 있다. 못 먹고 못 자는 상황에서도 담배를 피우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는데, 중국 전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이 때문에 고생을 했다고 한다.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의 파죽지세에 밀려 대만으로 도피한 49년 10월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건국에는 성공했지만 이후 급진적인 정책으로 논란을 빚었다. 중국을 영국과 같은 공업국가로 바꾸려던 대약진운동은 3년 만에 3000만명이 굶어죽는 대참극으로 끝났다. 이 여파로 2선으로 물러난 그가 반대파를 숙청하고 주도권을 다시 잡기 위해 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는 비판도 있다.

홍위병의 문화재 파괴와 조리돌림, 심문과 폭행, 고문으로 많은 이들이 죽었다. 또 문화, 사회, 경제, 외교관계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혼란은 그가 죽을 때까지 10년간 계속됐다.

하지만 추억은 아름답게만 기억되는 걸까.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관료의 부패가 잇따르는 자본주의 중국에서는 청렴한 정치를 중시하던 마오쩌둥에 대한 향수가 일고 있다고 한다

 

 


#모택동 #마오쩌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