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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6·10 민주화 항쟁

잊지 못할 잊을 수 없는  1987년 6월10일 그리고 6월 29일 생각한다.

그해 6월은 6월항쟁의 대명사로 통한다...

 

6·10 민주화 항쟁 --- 1987년 6월 10일

 

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날 간선제 선거를 통해 5공화국 정권을 승계할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 대표가 선출됐다. 같은 시각 대회장 밖. 전국 22개 도시에서 ‘박종철군 고문살인 및 호헌철폐 규탄대회’가 열렸다. 국민들은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서울의 시위대들 중 일부는 최루탄에 쫓기다 명동성당에 집결, 농성에 돌입했다.

6월 10일의 국민대회는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까지 가세,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항쟁’을 이끌어냈다. ‘6ㆍ10 민주화항쟁’ 결과 집권당인 민정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국민들에게 약속한 8개항의 ‘6ㆍ29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4ㆍ13 호헌조치‘ 또한 철회됐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2월의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5공 정권은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한다`는 이른바 ‘4ㆍ13 호헌조치‘로 맞서 학생시위를 잠재우려 했으나 민심은 오히려 정권으로부터 멀어져갔다. 게다가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민들은 기어이 민주화를 쟁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