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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베이비붐 세대가 걸어온 길(나의 길)-20071102

 <베이비붐 세대가 걸어온 길>
 
어린 농군에서, 서울유학, 80년대 광주 거쳐 ‘사오정’위기까지 걸어온 길
한국은 지난 반세기 유례없는 초고속 압축성장의 길을 내달리면서 절대빈곤이라는 굴레를 멀리 벗어던질 수 있었다. 성장의 엔진이자 원동력이 됐던 세대가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들이다. .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친 윗 세대들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근대에서 현대까지를 한 생애 안에 다 겪어내고 있는 세대다. 숨가쁘게 살아온 그들의 역정을 보면 향후 20년 동안 펼쳐질 미래가 보인다. 주입식 교육과 치열한 경쟁사회를 뚫고 나온 탓인지 그들은 유난히 억척스럽다는 평을 듣는다. 그토록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베이비붐 세대는 어떠한 열정과 에너지로 한 시대를 견디며 고군분투해왔던가? 듣고 나면 잠시 눈감고 싶어지는 그들의 이야기에는 따뜻한 추억과 묘한 그리움과 해학적 상상력이 묻어난다.

◆ 유년시대
시골에 살았던 베이비부머들은 강요당한 ‘어린 농군’들이었다. 학교에 갖다오면 책보를 끄를 사이도 없이 논으로 밭으로, 나무하러 산으로 가야했다. 또 이승복 소년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주제로 한 반공방첩 글짓기와 웅변대회가 학교마다 열렸다. 마을산을 뒤져 북한이 뿌린 ‘삐라’(흑색선전용 전단)를 줍는 것이 일과였다. 그 삐라를 학교에 갖고 가면 연필이나 상품으로 바꿔줬기 때문이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들이 유년 시절을 보낸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너나할 것 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베이비 세대의 맏형격인 1955년생인 류철상(회사원)씨는 “미국이 원조한 식량을 급식으로 받았다. 커다란 ‘바케쓰’(양동이)에 담긴 노란 옥수수가루 죽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섰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아 삼거리에 있던 숭인초등학교는 한 학년이 거의 20반에 달했고, 3학년 때는 3부제 수업을, 4학년 때까지 2부제 수업을 해야 했다. 학생수가 1만명에 달해 운동장에 다 모이기가 어려웠을 정도였다”고 콩나물 교실 시대를 돌아봤다.

‘옛날 신문을 읽었다’ 의 저자인 이승호(1960년생)씨는 시골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괴기스러운 소문을 들었다.“할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는 애가 있었는데 ‘먹을 게 없어서 쥐를 잡아먹는다’는 얘기였지요. 그 아이는 늘 점심을 굶었고 소풍 갈 때조차 도시락을 못싸왔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 변두리로 상경이사를 했습니다. 서울 장안동에 살 때 어떤 아이는 밥과 반찬으로 된 도시락을 쌀 수 없었지요. 수제비를 도시락통에 담아왔고, 퉁퉁 불은 수제비를 먹었어요.”

그는 “월남파병 이후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로 나뉘어 허구한날 전쟁놀이를 했다. 형들은 용감한 파월장병이 되고 꼬맹이들은 울며겨자먹기로 베트콩 역할을 해야했다”고 말했다.

◆ 청년시대
‘선데이서울, 통기타, 심야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 이런 것들이 베이비붐 세대들의 청년기 문화아이콘이었다. 여자친구를 ‘깔치’, 아버지를 ‘꼰대’, 담배를 ‘구름과자’, 성냥을 ‘망치’라는 자신들만의 은어로 불렀다.

또 베이비붐 세대가 즐겨 마시던 술은 맥주나 양주가 아닌 소주였다. 서울 남대문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이성부(1957년생)씨는 ‘소주 한잔에 인생을 담고’라는 책을 쓴 소주예찬론자다.

“경복고 1학년 때 남들이 서울대 가려고 열심히 공부할 때 광화문 뒷골목에서 재수생, 삼수생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지요. 서울 교육대학에 입학한 뒤 학교에는 안다니고 대학산악부 활동을 열심히하며 무지하게 마셨어요. 결국 학교는 중퇴하고 산악부만 무사히 졸업했지요.”

포크음악 동아리인 ‘청개구리 친구들’ 카페지기 김민수(1960년생)씨는 1970년대 방송프로에 보낸 엽서가 미술 작품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라디오는 귀로 정확하게 들어야 하므로 TV와 백번 달랐어요. 포크가수 윤형주씨가 진행하던 라디오 대담 프로에서 나온 말들이 친구들 사이의 유행어였고, 수준높은 개그였지요.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그 한 곡을 다시 듣기 위해 온갖 라디오 채널을 돌려가며 듣던 시절이었습니다.”

8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이승호씨는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공부할 엄두조차 안났다는 것. 그는 “광주사태가 터졌다. 학교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장갑차와 군인들… 공부하는 것도 죄가 됐던 ‘죄의식의 시대’였다”고 돌아봤다.

◆ 장년시대
베이비부머들은 1997년에 국제통화기금(IMF)시대라는 엄혹한 파고에 휩쓸렸다.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40대 초·중반의 장년기에 진입한 뒤 조기 퇴직자가 된 사람이 속출했다.

현재는 경기 하남시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김모(1956년생)씨는 대기업에 다니다 1998년 명예퇴직을 한 뒤 자영업자로 변신했다. 그는“5년마다 직종을 바꿔야 했다. 1999년 닭갈비집을 차렸다가 돈만 날렸고, 지난 2004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불닭집도 해봤다. 너도나도 뛰어들다보니 우리 또래에서 사업을 하던 10명 중 9명은 망할 각오를 해야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직장을 다니는 베이비부머 가운데 55년생은 2~3년 뒤 정년을 맞는다. 이들의 공통된 고민은 노후가 불안하다는 것이다. 평균수명 80세 시대가 임박했다. 하지만 베이비부머들은 하루하루 먹고 사는데 매달리느라 노후를 준비하지 못했다. ‘인생 이모작 시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20~40년의 ‘수명 보너스’가 주어진 만큼 인생을 전·후반기로 나눠 각기 다른 삶을 살자는 것이다.

하지만 중년의 삶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출판사 행복포럼의 김창기(1959년생) 대표는 “아무리 극적인 상황변화라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면 충격을 덜수 있고, 준비를 미리한다면 인생을 2, 3개로 쪼갤 필요도 없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 준비”라고 말했다.
 
--- 문화일보에서 퍼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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