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아주 우연히 덕혜옹주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참 복없고 불쌍하고 가련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내내 머리속을 맴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 덕 혜 옹 주
경술국치(1910년) 뒤인 1912년 덕수궁에서 출생하였다.
고종의 고명딸로서 5살때 준명당에 유치원이 만들어질 정도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총독부는 처음에는 그를 왕공족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했으나 1917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명으로 왕공족으로 정식 인정되었다.
이름 없이 "복녕당아기(福寧堂阿只)"라고 불리다가 고종 사후인 1921년 5월 4일(양력) 덕혜옹주라는 이름을 받았다. 서울의 히노데(日出) 소학교를 거쳐 일본에 강제유학을 간 그녀는 1925년 도쿄 가쿠슈인 대학(学習院大学)에 입학하였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신경쇠약에 걸렸다. 1930년 모친 복녕당 양씨(귀인 양씨)의 죽음을 계기로 정신분열증(조발성 치매증) 증세를 보였으나 이내 호전되었다.
일본 데이메이 황후의 명령으로 1931년 5월 8일 도쿄에서 쓰시마섬 도주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종무지)와 강제 혼인하여 이듬해 8월 14일, 딸 마사에(正惠, 정혜)를 낳았으나 출산 후 지병이 악화되어 1953년 남편 소 다케유키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1955년에는 딸 마사에마저 행방불명되는 불행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정신장애로 도쿄 인근의 마쓰자와 병원에 입원하는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일한 김을한 기자에 의해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에 귀국하였다.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에 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방자 여사와 만난 자리에서 덕혜옹주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치며 그런 분이 있었냐고 말했고 그 뒤, 박정희 정권에서 제창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으로 구황족에 포함된 그녀는 1962년 1월26일 오후 12시35분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왔으며 이후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으며 창덕궁에서 생활하였다.
귀국 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양덕혜라는 이름의 호적을 받았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30년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조선을 방문한 덕혜옹주의 행적을 존경심을 담아서 보도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귀국 후에는 의민태자비 이방자 일가 및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기거하며 노환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타계하였다.
현재 덕혜옹주의 묘소은 아버지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洪陵)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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