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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콜럼버스 아메리카 대륙 발견 --- 1492.10.12 콜럼버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다 ---- 1492. 10. 12 1492년 10월 12일 오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지구 구체설에 대한 믿음에 충실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두 달이 조금 넘는 항해 끝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 중 과나하니 섬에 도착해 이 섬을 ‘산살바도르(구원의 성자)’라 이름 지었다. 그는 이곳을 인도라 믿었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칭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20대에 항해술을 배워 인도의 금에 대한 열망으로 스페인 여왕 이사벨을 설득해 총 4회의 항해를 하여 현재의 미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의 침략행위로 원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고 전염병까지 옮겨와 잔혹한 정복자로서 콜럼버스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 제.. 더보기
김대중, 내란음모로 사형선고 --- 1980. 9.17 김대중~ 내란음모로 사형 선고 --- 오늘의 역사 - 1980. 9. 17 1980년 9월 17일....... 계엄보통군법회의는 내란음모혐의로 DJ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80년 당시 신군부가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5·18 광주민주화 항쟁이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조작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당시 DJ가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 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한 법정 최후진술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세계 각국 지도자와 종교인, 인권단체들의 압력으로 형은 무기와 20년형으로 연이어 감형됐고, 1982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출소하여 미국으로 출국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를 마.. 더보기
모택동 사망 --- 1976. 9. 9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사망 --- 1976. 9. 9 1893년 12월 26일 중국 후난성에서 태어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주도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애연가로 알려져 있다. 죽기 2년 전인 81세까지 하루에 40개비에서 60개비쯤 피웠다고 한다. 그에 관한 글이나 사진을 보면 손엔 언제나 담배가 들려 있다. 담배를 피우면서 그는 현대 중국의 큰 그림을 그려나갔다. 18세 소년이 처음 담배를 피우던 즈음 중국은 신해혁명의 격랑에 있었고 소년은 혁명군 소속의 한 부대에서 사병으로 6개월을 보내면서 중국의 변화를 몸으로 체감했다. 28세, 흡연 10년차에 그는 마르크스 사상에 기반한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가 열렸는데, 이때부터 공화국 건국 때.. 더보기
브라질 독립 --- 1822. 9. 7 브라질 독립 ---- 1822. 9. 7 1822년 9월 7일 오늘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선언 포르투갈이 점령하기 전, 브라질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곳에선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투피과라니 인디언이었다. 이들은 흩어져서 유목생활을 했으며 국가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1500년 4월 포르투갈 해군 부함장 페드루 알 레스 카브날 (pedro alvares cabral)이 인도 항해중 브라질을 발견하였고 이로써 최초로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포르투갈인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 그러나 브라질(brasil) 이라는 값진 붉은 염료를 함유한 수종이 발견되고 당시 경쟁국가이던 프랑스와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적극적으로 식민지화에 나서게 되었다. 브라질이라는 국명은 이 염료를 함유한 .. 더보기
화가 이중섭 타계 --- 1956. 9. 6 화가 이중섭 타계 --- 1956년 9월 6일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만 40세를 앞둔 서양화가 이중섭이 정신질환과 간질환으로 숨졌다. 그러나 시신은 연고자가 없어 3일간이나 방치된 뒤에야 수습됐다. 평안남도 평원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고 일본 유학 중 이미 전위적 그림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귀국 후 일본에서 뒤따라온 일본 여성 마사코(이남덕)와 결혼하고 원산사범학교 교원이 됐으나 6·25 전쟁으로 남하했다. 제주까지 내려온 그는 대표작 〈황소〉·〈흰 소〉·〈투계〉·〈닭과 가족〉·〈아이들과 물고기와 게〉 등을 그리며 짧은 행복을 누렸으나 생활고로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떠나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술로 점점 폐인 같은 생활을 이어 가다 쓰러지고 말았다. 향토적이며 개성적.. 더보기
페니실린 발견(플레밍 박사---1928.9.3) 플레밍 박사, 페니실린 발견하다 --- 1928. 9. 3) 1928년 9월 3일 영국 런던대학에서 유행성 독감을 연구하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는 세균 배양 접시에서 특이한 곰팡이를 발견했다. 다른 박테리아를 다 죽인 채 혼자 남은 이 푸른곰팡이는 이후 ‘페니실리움 노타툼’으로 이름 지어졌다. 탁월한 항생제인 페니실린은 40년 치료용 주사제로 만들어져 20세기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독감, 기관지염, 급성 폐렴 등의 질병 치료에 효과적으로 쓰여 사망자를 크게 줄이는 데 기여했다. 플레밍 박사는 페니실린 농축과 정제에 성공한 옥스퍼드대학의 피오리와 체인 두 사람과 함께 45년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페니실린의 장점은 다른 약물들과는 달리 백혈구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페니실린 이.. 더보기
악티움 해전(옥타비아누스 승리) - BC 31. 9. 2) 옥타비아누스,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 ( BC 31. 9. 2) 기원전 31년 9월 2일 로마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 악티움 앞바다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악티움은 그리스 북서부의 반도인데 육지 전투를 주창한 안토니우스가 해상 결전을 고집한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옥타비아누스의 함대와 격돌했던 것이다. 양 진영은 각각 500척 이상의 함선을 보유했으나 옥타비아누스의 부장 아그리파가 바람의 방향을 계산한 교묘한 전술로 기선을 제압, 안토니우스 함대를 격파하여 옥타비아누스군의 대승리로 끝났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죽고 옥타비아누스는 천하통일을 완성해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자)란 칭호를 받고 초대 로마 황제로 등극했다. 더보기
홍난파 타계(1941. 8. 30)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음악평론가, 수필가, 소설가, 번역가 등으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쳤던 홍난파가 1941년 오늘, 늑막염으로 경성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이때 나이 불과 43세. 홍난파는 1910년 국악을 배우려고 YMCA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바이올린을 접한 후 서양음악으로 방향을 바꾼다. 일본 도쿄음악학교를 나와 1919년 국내에서 최초의 음악잡지 〈삼광〉을 냈고, 도쿄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다 다시 서울에 돌아와서는 재즈 밴드를 만들어 방송 활동을 하기도 했다. 홍난파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의 애수가 서려 있는 ‘봉선화’, ‘금강에 살어리랐다’,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등의 가곡과 ‘퐁당퐁당’, ‘고향의 봄’, ‘낮에 나온 반달’ 과 같은 동요 등 그가 없는 음악 .. 더보기